[송평인 칼럼]죽이 되든 밥이 되든 법원에 맡겨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31일 03시 00분


재판은 사실심과 법률심으로 구성… 헌법이 예정한 대로 사실심 받을 권리
특별재판부가 침해할 소지 있어
법원이 반성 뜻으로 수사 수용했는데… 특별재판부는 他律을 강제하는 것
그래도 법관공동체의 양심 믿어야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양승태 대법원·법원행정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판사가 사법농단 재판을 맡을 경우에만 공정한 재판이 우려된다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불분명한 블랙리스트를 들고나와 사태를 키운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관련된 판사가 재판을 맡을 경우에도 재판이 공정하겠느냐는 우려가 있다. 더 나아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었을 뿐 아니라 그 전신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이었던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공정한 재판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도 가능하다. 다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기 맘에 맞는 재판부에 대한 요구를 자제하는 것이 사법의 독립을 존중하는 자세다.

더불어민주당이 구상하고 있는 사법농단 특별재판부는 1, 2심 재판만 특별재판부에 맡기고 최종 판결은 대법원이 한다는 것이다. 1, 2심은 사실심을 책임지고 그중 2심은 사실심의 최종심이다. 대법원 재판은 법률심의 최종심일 뿐이다. 국민은 헌법이 예정한 절차대로 사실심과 법률심을 모두 받을 권리가 있다. 1, 2심을 특별재판부에 맡기는 것은 국민에게서 헌법상의 사실심 절차를 박탈하는 것이다.

물론 대법원이 법률심만 맡는 게 아니라 주요한 사실의 확정도 다루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특별재판부가 1, 2심을 다루건, 통상의 재판부가 1, 2심을 다루건 어차피 대법원으로 사건이 올라올 수밖에 없을 텐데 1, 2심만 특별재판부에 맡기는 것은 법적으로 실효적인 의미가 없다. 단지 자기 맘에 맞는 판사들로 1, 2심을 구성해 그 재판 결과로 대법원 재판을 압박하려는 꼼수일 뿐이다.

권력 분립에 입각한 국가에서 국가의 일관성을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곳은 사법부다. 국회는 다수당이 바뀌면 바뀌고 정부는 수반이 바뀌면 바뀌지만 사법부는 그런 식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하지만 바로 선출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탄핵에 의하지 않으면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일관성의 토대가 된다.

사법부가 일관성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집권세력이 누가 되든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별재판부는 그 일관성을 중단시킴으로써 국가를 단절시킨다. 특별재판부를 만들고 싶으면 반민특위처럼 헌법적 근거부터 마련하거나 5·16처럼 자칭 혁명부터 하는 것이 그나마 제정신일 것이다.

사법농단 의혹에 대해 법원 자체 조사위는 3차례 조사 끝에 사법권 남용은 부적절하지만 죄는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을 유보한 것은 김 대법원장이다. 그에 대해 법원 조사위의 결론에 맞춰 사태를 봉합했어야 했으며 그러지 못해 전례 없는 사법부 불신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런 비판은 사법농단 압수수색영장이 90% 가까이 기각되고 있는데도 김 대법원장은 팔짱만 끼고 있다는 비판과 똑같이 사법농단의 원인인 관료적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이 법원 조사위의 결론을 유보시킨 것은 법원 내부의 결론만으로 법원 외부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검찰 수사를 거쳐 법원 안에서만이 아니라 법원 밖에서도 수긍할 최소한의 공감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달리 말하면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 다시 안으로 돌아오는 변증(辨證)적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야만 즉자(卽自)적 결론은 그 유치함을 극복하고 대자(對自)적 결론으로 성숙해진다. 다만 변증적 과정에서 출발점과 종착점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최종적 판단권이 법원으로 돌아오지 않고 엉뚱하게 특별재판부로 귀속되는 것은 법원에 타율(他律)을 강제하는 것으로, 검찰 수사를 받기로 하면서 본래 의도한 성숙한 자율(自律)의 추구로부터 이탈이 된다.

최종적 판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법부에 맡겨야 한다. 아마도 죽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법원 내에서는 이 사건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다. 그 시각들이 버무려져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버무려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고 할 때 그 양심은 단순한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법관공동체의 양심이라고 한다. 그런 양심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요구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 양심은 나의 주관에도 없고 너의 주관에도 없다. 주관들이 버무려져 얻어지는 상호주관적 결론, 그것을 사후적으로 법관공동체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모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양승태#사법농단#특별재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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