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 정점인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이 24일 구속됐다. 일평생 승승장구 ‘꽃길’만 걷던 엘리트 판사는 결국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된 전직 대법원장이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부산 출신으로 경남고와 서울대 법대에서 공부했다. 1970년 대학 졸업과 함께 1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1975년 11월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법관 경력을 시작했다.
사법연수원 교수와 법원행정처 송무국장, 서울지법 파산수석부장 등을 거쳐 최종영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03년 2월 법원행정처 차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연공서열에 따른 대법관 제청에 반대하며 판사 160명이 연판장에 서명하고 사법개혁을 요구한 이른바 ‘4차 사법파동’으로 같은 해 9월 특허법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2월 대법관에 임명돼 대법원에 재입성했다. 2009년 2월부터 2년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9월 제15대 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임명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안정 지향적 판결로 보수 성향이 뚜렷해 이명박 정부 ‘코드’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당시 취임사에서 “사법부 사명은 법치주의를 구현해 일관성이 유지되고 예측 가능성이 보장되는 평화로운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라며 “그래야 자유민주사회 가장 고귀한 가치인 개인의 가치가 보장되고 모든 국민이 각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며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보수 성향은 법관 시절 판결에서도 드러났다. 양 전 대법원장은 1986년 간첩 조작 사건으로 기소된 강희철씨 사건 재판장을 맡아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총 6건의 간첩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들은 재심에서 조작 사실이 밝혀져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대법관 시절인 2009년 1월에는 한국청년단체협의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반국가 단체 활동을 목적으로 내걸지 않았더라도, 실제 활동이 국가 존립에 해악을 끼칠 위험성이 있다면 이적단체로 봐야 한다”며 유죄로 인정하기도 했다.
대법원장 임기 중 원로법관제를 실시해 법관 정년 보장 길을 열었고, 대법원 공개변론 생중계를 시작했다. 10년 이상 법조경력자 중 법관을 임용하는 법조일원화도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전면 시행됐다.
상고사건과 고위 법관 인사 적체 해소 방안으로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했고, 결국 청와대와 국회 등을 상대로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까지 받게 됐다.
법관 블랙리스트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증폭되는 가운데 양 전 대법원장은 2017년 9월22일 임기를 마무리했다. 퇴임 이후 양 전 대법원장이 공개 석상에 나타난 건 지난해 6월1일 사법농단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준비한 ‘놀이터 기자회견’이 유일했다.
이후 7개월 뒤인 지난 11일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소환 전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부당한 인사개입이나 재판 개입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후배 법관의 판단은 달랐다.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범죄사실 상당 부분 혐의가 소명됐고 사안이 중대하다”면서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엘리트 판사로 한평생 승승장구했던 양 전 대법원장은 24일 결국 서울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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