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날 구치소에서 대기하던 전직 대법원장과 전직 대법관의 운명이 엇갈렸다. 전직 대법원장은 그대로 구속됐고, 전직 대법관은 집으로 돌아갔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된 것은 사법부 71년 역사상 처음이다.
24일 법원에 따르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고 있는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62·12기) 전 대법관의 구속 심사 결과는 달랐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같은 법원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박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당초 사상 초유의 전직 대법원장 구속영장 청구에 법조계 안팎에서는 발부가 쉽지 않으리라는 관측이 나왔다. 양 전 대법원장이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있고 법리적으로 죄가 성립되는 지 여부 등을 첨예하게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속영장이 전격 발부되면서 당시 최고 결정권자로서 양 전 대법원장의 책임이 인정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임 시절 재판 개입 등 각종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주도·지시를 했다는 검찰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는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사유에도 드러나 있다. 명 부장판사는 “범죄사실 중 상당부분의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의 40여개 혐의 상당 부분이 인정되고 일련의 ‘사법농단’ 의혹 관련 범죄혐의가 중대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은 ‘공범’이자 ‘핵심 중간 책임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구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임 전 차장과 거의 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임 전 차장의 범죄혐의가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으로 나뉘었다가 양 전 대법원장으로 다시 합쳐지는 모양새다.
임 전 차장은 구속 이후 검찰 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각종 의혹 관련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개입 여부 등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다른 관련자들의 진술과 자료 등의 증거로 혐의가 소명됐다는 해석이다. 또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 청구서에는 임 전 차장 때는 포함되지 않았던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혐의 등도 추가됐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반드시 처장을 통하지 않고도 실무 담당자들에게 직접 업무 보고를 받은 진술 등도 확보했다. 임 전 차장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접 보고한 사례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취임해 2017년 퇴임했다. 임 전 차장은 2012년 8월부터 3년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하다가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7년 3월 의혹이 불거져 사직하기까지 법원행정처에서 5년여간 일했다.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서 그 지위를 고려할 때 증거인멸 우려도 있다고 봤다. 그가 ‘실무진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는 등 책임을 떠넘기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법원행정처 근무 판사 등에 대한 영향력에 비춰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에서 ‘말맞추기’ 등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 것으로 풀이된다. 두 번째 구속 위기를 맞았던 박 전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과는 달리 한숨을 돌렸다. 검찰은 지난해 12월7일 박 전 대법관의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40여일간 보강수사를 벌여 영장을 재청구했지만 그 결과를 뒤집지는 못했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이 고등학교 후배의 형사재판 기록을 무단으로 확인한 혐의(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와 서기호 전 정의당 의원의 법관 재임용 탈락 취소 소송 관련 재판개입 등 혐의를 새로 포함했다.
하지만 허 부장판사는 “추가된 피의사실 일부는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있다”고 밝혔다. ‘죄가 되지 않는다’는 박 전 대법관 측 주장과 같이 범죄 성립 여부를 두고 법리 다툼이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의 수사내용을 고려해도 박 전 대법관의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차 구속영장 청구 당시에도 법원은 “범죄혐의 관여 범위 및 그 정도 등 공모관계 성립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기각했다.
박 전 대법관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등 각종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이 고교 후배의 상고심 재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판결을 한 정황 등을 파악하고 재판부 배당 조작 등 추가 수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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