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 전격 재수사]광주시-교육청 책임 떠넘기기… 피해학생 치료 6년째 외면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30일 03시 00분


인화학교 대책위 “진상 규명” 6년 몸부림

관계기관들 “감독권한 없다” 피해구제 뒷짐… 피해학생들 ‘도가니’ 예고편 보고 큰 충격

‘인화학교’ 글씨 지우는 교직원 2000년부터 장애인 성폭력 사건이 벌어진 광주 광산구 삼도동 인화학교. 한 교직원이 통학차량에 적혀 있는 ‘인화학교’ 글씨를 지우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인화학교’ 글씨 지우는 교직원 2000년부터 장애인 성폭력 사건이 벌어진 광주 광산구 삼도동 인화학교. 한 교직원이 통학차량에 적혀 있는 ‘인화학교’ 글씨를 지우고 있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영화 ‘도가니’에서 배우 정유미 씨가 연기한 인권운동센터 간사 서유진은 당시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장이었던 윤민자 씨(40·여)를 모델로 설정된 인물이다. 윤 씨는 2005년 6월 인화학교에 다니던 한 장애인 여학생의 충격적인 성폭행 소식을 듣고 진상규명 및 가해자 처벌운동을 촉구하는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긴긴 싸움을 이끌었다. 그는 영화 ‘도가니’ 사건이 세상에 크게 알려지기 전인 2009년 8월 미국으로 이민을 가 현재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살고 있다.

윤 씨는 2007년 1월 12일 광주 광산구청 앞에서 240일 넘게 이어온 천막농성을 접었다. 이 자리에서 윤 씨는 “인화학교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피해학생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함께 농성을 한 광주여성의전화 채숙희 대표는 “8개월이 넘게 버티며 계속한 천막농성에도 뚜렷한 답변이 없자 모두 지쳐버렸다”며 당시 힘든 상황을 회상했다. 천막농성은 접었지만 윤 씨가 이끌었던 대책위는 2007년 4월 2일부터 5월 25일까지 광주시교육청 앞에서 인화학교 피해학생들과 함께 천막수업으로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또 같은 해 11월 19일 다시 광주지법 앞에서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는 천막농성에 들어가는 등 그가 천막 아래서 눈물 흘리며 몸을 뉘었던 날이 무려 280일에 이른다.

2008년 8월에는 청와대 앞에서 삭발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윤 씨는 최근 한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영화 ‘도가니’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는 소식에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하지만 서운하지는 않다”며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야 목적했던 바를 달성한 것 같아 오히려 기쁘다”고 말했다.

당시 인화학교 성폭력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몸부림은 최근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 무려 6년여 동안 계속됐지만 별다른 도움도 받지 못했다. 대책위는 2005년 7월 결성 당시부터 피해학생들에 대한 심리·재활치료 지원 등을 광주시, 광주시교육청, 광주 광산구에 요청했지만 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기관들은 (인화학교가) 학교라 행정기관이 관여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거나, 복지시설(위탁기관)이어서 교육기관이 감독할 수 없다는 어이없는 사유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광주시는 ‘피해학생들이 생활하는 그룹 홈 지원’을, 광주시교육청은 ‘인화학교에 심리상담사 배치’를 했다고 해명했지만 그룹 홈은 사회복지사업으로 공통 지원되는 예산이고 인화학교 피해학생 18명은 이미 학교를 떠난 상황이었다. 피해학생들의 심리 치료는 대책위 관계자 30명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6년간 단 두 차례 했을 뿐이다. 그것도 홀더공동체가 지역아동센터 사업의 기업 후원을 신청해 겨우 진행됐다. 결국 이 기관들은 6년간 피해학생들에 대한 구제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시교육청과 광주시, 광산구는 28일 광주시청에서 각 기관의 실무팀장급 회의를 갖는 등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책위 관계자는 “인화학교 문제가 도가니처럼 끓어올랐다가 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피해학생들이 평생 고통을 받는 만큼 실질적 지원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영화 ‘도가니’는 흥행몰이를 하고 있지만 정작 피해학생들은 아픈 기억 때문에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모두 18명. 이 중 9명은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당한 남녀 학생이고 나머지 9명은 교장 등에게 항의하다 학교를 그만뒀다. 이 사건의 ‘직접 피해자’들은 8월 모 방송사가 주최한 후원의 밤 행사 때 ‘도가니’ 예고편을 봤다. 1분 47초짜리 짧은 영상이었지만 이들을 돌보고 있는 홀더공동체 김혜옥 원장(39·여)은 영상을 보여준 뒤 크게 후회를 했다고 한다. 김 원장은 “한 여학생이 영상을 본 뒤 ‘주인공이 나 같다’며 많이 울었다”면서 “영화가 왜 나오게 됐는지를 설명해주고, 주인공이 네가 아니라고 했지만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예고편을 본 충격 탓인지 피해학생들은 20일 광주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김 원장은 그날 이후 영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있으며, 홀더공동체를 찾아오는 피해학생 친구들에게도 “영화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대책위는 29일 보도자료를 내고 피해자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밀착 취재 등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며 자제를 요청했다. 대책위는 “뒤늦은 재조사와 부분적인 처벌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관심보다는 차분하고 진지한 고민들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당부했다.

광주=김권 기자 goqud@donga.com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동영상=아동 성폭력 고발...영화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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