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을 당한 여학생이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와 가해자 측 변호인에게서 무리한 진술을 강요받고 폭언을 듣다 울음을 터뜨리는 등 2차 피해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영화 ‘도가니’ 파장이 거세던 지난달 28일 오후 6시 반경 부산고법 창원재판부의 한 형사법정에서는 현직 목사로 재직하면서 공부방에 온 학생들에게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A 씨(37)의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A 씨 변호인은 피해자 B 양(2008년 피해 당시 10세)에 대해 ‘기존 진술에 문제가 있다’며 증인으로 불러줄 것을 집요하게 요청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변호인 측 요청을 받아들였다. 증인 신문이 1시간가량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B 양은 끔찍한 기억을 또다시 떠올려야 하는 고통을 받았다. 당시 공판 검사에 따르면 A 씨 변호인은 “목사님이 너보다 다른 여학생을 더 예뻐하고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목사님을 무고한 것 아니냐”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다그쳤다.
피해 당시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 여학생은 “아니에요. 제 말이 맞아요”라고 항변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를 보던 재판장이 증인 신문을 제지했다. 검찰은 “세밀한 기억이 흐려진 부분을 가지고 변호인이 지나치게 ‘오버’를 해서 ‘뭐 하는 거냐’고 항의까지 했다”고 전했다. 증인 신문은 사실관계만을 다투는 것이지만 이날 변호인의 질문은 피해자를 괴롭히고 모욕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A 씨 변호인은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피해자 진술이 엇갈린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질문을 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사건 재판부는 부산고법을 통해 “(성추행) 진술 시기에 대한 진술이 다소 달라서 변호사의 추궁과 압박이 있었고 피해자가 울음을 터뜨린 것도 사실이다”라고 전해왔다.
이번 사건 항소심 재판장이 어떤 이유로 피해자를 법정에 출두시켰는지, 또 왜 신문 당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비디오 등 중계기를 이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아동의 경우 가해자인 피고인뿐만 아니라 변호인을 직접 대면하는 것도 심각한 2차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선 성폭력 전담재판부 판사들은 “성범죄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가해자의 변호인이 항소심에서 범행과 무관한 질문으로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무리하게 유도신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판결을 무죄로 뒤집기 위해선 변호인이 피해자를 증인으로 세운 뒤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혀서 피해자의 진술을 흔드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또 이 사건 수사 당시 경찰관이 피해 아동에 대한 초동수사 과정에서 피해자 진술을 올바르게 녹음·녹화하지 않아 1심 재판에서 증거로 쓰이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A 씨 혐의 일부에 무죄가 선고됐다. 법조계에서는 경찰의 부실한 초기 대응이 성범죄 피해 어린이에 대한 2차 피해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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