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직함이 '정의(Justice)'였던 공직자, 김학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일 03시 00분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건설업자 윤중천 씨(58)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접대에 동원한 여성들은 평범한 20대의 사회초년생들이었다. 이들이 윤 씨의 강원도 원주 별장으로 불려온 사연은 비슷했다. 윤 씨는 재력가 행세를 하며 이들과 안면을 튼 뒤 모처로 유인해 기습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다. 그러곤 몰래 촬영한 성관계 영상을 보여주며 겁을 주고 시키는 대로 하면 도움을 주겠다며 회유했다는 게 이 여성들의 경찰 진술이다.

이런 여성들 중 일부가 김 전 차관의 접대 자리에 투입됐다. 이들은 2013년 경찰 수사 당시 “윤 씨와 김 전 차관이 요구한 성행위는 거의 성학대에 가까웠다”고 진술했다. 피해 여성 중에는 정신적 충격에 자살을 시도한 사람도 있다.

피해자들이 경찰에 했던 진술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김학의와 대질조사시켜 주세요.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성접대를 받은 사람은) 김학의가 맞습니다.”

문제의 ‘성관계 동영상’ 속 남성은 김 전 차관인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김 전 차관으로선 윤 씨가 여성들을 제공해줘 성관계를 했을 뿐 강간은 아니었다고 주장할 소지도 있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특수강간 혐의에 대해 두 차례 연속 무혐의 처분했다. 피해 여성들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사건 전후 언행이 ‘피해자다움’과 거리가 멀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전 차관은 윤 씨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반발을 못 하게 된 여성들을 상대로 성욕을 충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여성들이 검찰 고위 간부인 그의 앞에 섰을 땐 이미 저항 의사를 상실한 뒤였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성접대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성학대’를 어떻게 심판할 것인지가 이번 사건의 중요한 본질이다.

김 전 차관이 성접대를 받을 수 있었던 원천은 그가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공권력이었다. 윤 씨는 김 전 차관 등 권력자와의 친분을 내세워 사업자금을 끌어모았다. 성접대가 핵심 수단인 윤 씨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김 전 차관은 최상위 포식자에 가까웠다. 김 전 차관의 높은 지위가 접대를 학대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그 학대는 ‘증거 불충분’으로 증발해버린 게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였다.

1일 재수사에 나선 검찰 특별수사단은 김 전 차관이 여성들에게 가했던 성폭력 의혹의 실체를 상세히 밝혀야 한다. 검찰이 그동안 두 차례 수사에서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배척했던 피해 여성들의 진술도 원점에서 다시 들어야 한다. ‘그루밍(가해자에 의한 성적 길들이기) 성폭력’ 등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김 전 차관은 그동안 검경 수사에서 “윤 씨는 모르는 사람이고 성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가 최근 태국으로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붙잡힌 것도 지난 6년간의 언행에 비춰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외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그의 예전 직함인 법무부 차관을 ‘Vice Justice Minister’라고 표기했다. 그는 한때 직함에 ‘Justice(정의)’가 들어가는 한국의 최고위 공직자였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김학의#특별수사단#그루밍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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