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발생한 ‘인천 어린이집 폭행사건’. 한 달이 지난 요즘, 어린이집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죄인 취급 받다 못해 사표를 내고 떠나가는 어린이집 교사들, 불안감에 아이를 비싼 영어유치원이나 놀이학교로 옮기는 부모들…. 여전히 어수선한 어린이집 현장을 점검했다. 》
“선생님, 혹시 자격증 어디서 받았어요?”
학부모로부터 ‘돌직구’가 날아왔다. 1월 중순 인천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알려진 뒤 ‘사이버대 출신 교사’에 대한 의심이 커졌을 때였다. 가정형편 때문에 23세에 사이버대에 입학해 보육교사 자격증을 딴 게 잘못이었나. 출신 학교만으로 나는 ‘함량 미달’ 교사로 낙인찍혔다.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더니 생중계를 하라는 부모들도 있다. 결국 이달 초 어린이집을 그만뒀다. 부모들의 의심과 막말에 상처 입고 견디느니 4년제 대학에 들어가 공부나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서울 광진구 어린이집 교사 최모 씨)
‘어린이집 폭력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정부는 지난달 말 자녀를 안심하고 보육시설에 맡길 수 있도록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부모들의 따가운 눈총에 교사들의 사기는 점점 꺾여 간다. 영세 어린이집을 믿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를 영어유치원이나 놀이학교로 옮겼다.
○ 몸도 마음도 떠난 어린이집 교사들
보육교사 커뮤니티에는 최근 최 씨처럼 ‘사직하겠다’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배창경 한국보육교직원총연합회 대표는 “거의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고도 열심히 일했던 교사들이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며 “이 때문에 사표를 내거나, 상대적으로 부모들 인식이 좋은 대형 어린이집, 유치원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교사들의 사기를 꺾는 요인 중 하나는 학부모들의 극성스러운 민원이다. 3년 차 보육교사 권영아(가명·26) 씨가 일하고 있는 경기 오산시의 어린이집은 정부 대책 발표 이후 CCTV를 설치했다. 그러자 학부모들은 “스마트폰으로 생중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시에 방문한 게 한 달 동안 5건이 넘었다. 아이의 가방이나 옷에 녹음기를 장착한 뒤 어린이집에 보내는 부모도 있다. 권 씨는 “부모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아무리 진정성 있게 설명해도 안 믿으면 교사들은 어찌 할 방법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이버대 자격증 논란’ 때문에 교사에게 다짜고짜 출신 대학을 묻는 부모의 태도도 보육교사들의 사기를 꺾는다. 경기 의정부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보육교사 서모 씨는 “한 어머니는 ‘애를 학위 있는 선생님에게 맡기고 싶다’며 전체 교사들 출신 학교를 물었다”며 “교육 과정에 대해 논란은 있지만, 출신 성분만 가지고 막연한 불신을 갖는 건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 고급 유치원, 놀이학원으로 옮기는 추세
정부의 대책 발표에도 불안을 씻지 못하는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 보육기관을 다소 부담스러운 고가의 영어유치원과 놀이학교 등으로 옮기는 추세다. 수업료가 100만 원에 가깝지만, 영세한 어린이집에 맡기고 불안해하느니 비싸더라도 시스템을 잘 갖춘 곳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워킹맘 강모 씨(35·영어학원 원장)는 “한동안 영어유치원 인기가 하락세라고 해서 동네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마음을 바꿨다”면서 “교육비가 3∼4배 더 들지만 입소문을 중시하는 비싼 유치원은 관리가 철저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4세 여아를 둔 박모 씨(31)도 “대형 어린이집이나 놀이학교로 아이를 옮긴다는 엄마들이 꽤 있다”며 “새 어린이집을 구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교육 업계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을 체감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놀이학교는 “인천 어린이집 사태 이후 지금까지 5명이 어린이집에서 옮겨 왔다”며 “중간에 들어온 아이들을 위해 적응 기간을 2주로 잡고 아이들의 적응 양상을 매일 부모에게 알리는 서비스를 제공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의 한 놀이학교 역시 “최근 어린이집에서 원아 4명이 옮겨 왔다”며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서 우리 기관의 CCTV 설치 현황, 소수 정예, 부모 동참 수업 가능 등을 내세워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관은 한 달 원비가 90만 원에 이르지만 최근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등록하는 원아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 갈수록 어려워지는 영세 어린이집
반면 영세 어린이집의 상황은 사건 발생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정어린이집연합회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학기 원아 모집에 어려움을 겪거나, 기존의 원아를 놓쳐 경영난에 시달리는 영세 어린이집이 많아졌다.
정원 20명 규모의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원장 박모 씨는 “부모들이 많이 불안해하면서 4명 정도 원아들이 그만 나오게 됐다”며 “이 아이들 모두 대형 어린이집 입소를 기다리거나, 놀이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각종 관리감독 기준이 강화돼 이에 맞추려고 노력 중인데도 더 큰 보육기관을 찾아 떠나는 것을 보면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영세 어린이집이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것은 보육의 질 저하와 이에 대한 불신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보육 수요를 대형 국공립 어린이집에서만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양미선 육아정책연구소 부연구위원은 “영세한 어린이집이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며 “부모 역시 어린이집에 대한 막연한 불신을 버리고 ‘교사와 내가 힘을 합쳐 아이를 키운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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