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한 공군 비행장에서 경비행기가 이륙했다. 훈련용 항공기인 T-11. 저공비행으로 레이더를 피하는 북한의 대남 침투용 항공기 AN-2와 같은 기종이다. 우리 군의 정확한 보유 규모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주로 작전 때 적기(敵機)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늘을 향해 T-11이 치솟는 순간 엔진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기체 전체가 흔들렸다. 조종사가 조종간을 움켜쥐었지만 제어가 불가능했다. 조종사는 비상 상황이라 판단하고 기수를 돌려 가까스로 활주로에 내렸다. 경비행기인 T-11은 활공능력이 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추락할 수 있다. 2년 전에도 고장을 일으킨 T-11이 활공에 실패한 뒤 추락해 정비사 1명이 다치기도 했다.
군이 회항한 T-11을 확인한 결과 엔진의 실린더 헤드가 손상돼 있었다. 그러나 손상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 해 1월까지 T-11 여러 대가 엔진 진동 문제로 회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작전 수행에도 차질을 빚을 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T-11 엔진 이상의 원인은 경찰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오토바이나 농사용 트랙터에 쓰는 값싼 윤활유 탓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저가 윤활유를 특수 윤활유로 속여 군에 납품한 혐의(공문서 위조·행사 등)로 군납 화학업체 대표 이모 씨(58)를 구속했다고 25일 밝혔다. 경찰은 또 업체 직원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2014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방위사업청(방사청)에 34차례나 저가 윤활유를 납품했다. 저가 윤활유는 군용 특수 윤활유보다 40% 정도 가격이 싸다. 이 과정에서 이 씨는 15억 원의 부당이익을 남겼다.
이 씨는 공군 부사관 출신이다. 복무 당시 회계 관련 보직을 담당해 방사청과 군이 추진하는 군납계약의 허점을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수 윤활유의 경우 납품 계약업체가 미국 현지에서 구매한다. 이어 방사청이 지정한 현지 해외화물보관소에 선적된다. 이후 방사청이 수입 통관을 진행해 국내로 들여온 뒤 군에 보급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윤활유가 정품인지 확인하는 특별한 검수 절차가 없다. 그저 눈으로 수량과 포장 상태, 파손 여부만 확인할 뿐이다.
조사 결과 이 씨는 저가 윤활유를 빈 용기에 담아 수출 형식으로 미국에 보냈다. 정품 특수 윤활유 용기와 비슷한 용기에 저가 윤활유를 담고 위조한 정품 상표를 붙이는 방식이다. 정품을 입증하는 시험성적서와 수입신고필증 증명서도 위조했다. 방사청은 이 씨가 해외화물보관소에 선적한 저가 윤활유를 아무런 의심 없이 국내로 들여와 군에 보급했다.
이 씨의 저가 윤활유는 육해공군 장비의 잦은 고장을 불러왔다. 해상작전 주력 기종인 링스 헬기는 저가 윤활유의 수분 함량이 정품보다 높아 엔진 유압 계통이 손상됐다. 계속 사용했다면 링스 헬기가 망가지거나 사고로 이어져 장병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윤활유뿐 아니라 방청제도 불량 제품을 공급해 해군 함정의 추진 제어장치 전자기판이 녹기도 했다.
경찰은 방산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저가 윤활유 납품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비행기와 헬기 함정의 고장이나 성능 저하, 수명 단축을 초래해 막대한 국방예산이 낭비됐다”며 “납품 과정에서 군 관계자와 사업자의 유착 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 씨가 2014년 12월 국내 한 화력발전소에도 저가 윤활유를 납품한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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