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수행비서 김지은 씨(34)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54·수감 중)에게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됐다. 1심(무죄)과 2심(유죄)의 판단이 180도 달랐던 사건에서 대법원은 2심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위력에 의한 간음과 추행,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또 성폭력 프로그램 40시간 이수와 아동청소년기관 5년간 취업 제한 명령도 그대로 유지했다.
재판부는 2017년 7월∼2018년 2월 네 차례 성폭행과 네 차례 강제추행 등 검사의 공소 사실 10가지 중 9건을 유죄로 판단했다. ○ “진술 신빙성, 함부로 배척해선 안 돼”
대법원은 김 씨의 진술이 수시로 바뀐다고 본 1심과 달리,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라 믿을 만하다는 2심 판단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피해자가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형사재판에 있어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 형성의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여야 한다”면서도 “이는 모든 가능한 의심을 배제할 정도에 이를 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증거를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의심을 일으켜 이를 배척하는 것은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또 김 씨에게 피해 사실을 전해 들은 다른 비서들의 진술도 신빙성이 높다고 봤다. 비서들은 공판준비기일을 포함해 모두 5번의 재판 가운데 4번을 전부 또는 일부 비공개로 진행한 2심에서 안 전 지사에게 불리한 ‘추가 증언’을 내놓았는데, 대법원은 이를 중요하게 본 것이다. 대법원은 “피해가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에 피해자로부터 피해 사실을 들었다는 (비서들의) 진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또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의 성립 요건을 넓게 본 2심 손을 들어줬다. “폭행과 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피고인은 업무상 위력으로써 피해자를 간음 또는 추행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 ‘성인지 감수성’ 직접 언급
대법원이 김 씨 등의 진술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한 배경엔 ‘성인지 감수성’이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의 해임을 취소하라고 한 2심 판결이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판단이었다며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당시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활발하던 때다.
대법원은 이날 판결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직접 언급하며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여론이나 신분 노출의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일각에선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해야 판결에 논란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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