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물컵을 던졌던 3월 16일 회의에는 임직원 13명이 배석했다. 조 전 전무의 지적사항을 놓치지 않으려 여느 때처럼 녹음기가 작동 중이었다. 한 달 뒤 그 13명은 사건 목격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녹음파일은 범죄 증거로 압수됐다. 컵을 던지고 음료를 뿌리면서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 조 전 전무의 자업자득이다.
조 전 전무의 언니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12월 기내에서 박창진 전 사무장을 무릎 꿇릴 때도 옆에 탑승객이 있었다. 조 전 부사장이 서류철로 박 전 사무장 손등을 내리치며 내지르는 고성을 그들은 생생히 들었다. 어머니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공사장 직원들 앞에서 한 여직원을 몰아세웠다. 요즘 모녀의 폭언 녹취파일이 쏟아져 나오는 건 주변의 눈과 귀를 괘념치 않는 가족력 탓으로도 보인다.
무심함은 이 ‘비행 가족’이 휘두른 폭력의 본질을 보여준다. 동료와 고객 앞에서 인격이 짓밟힌 피해자의 굴욕감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수치심을 꼬집는 것은 가장 악랄한 언어폭력이다. 수치심을 느끼면 금방 티가 난다. 얼굴이 빨개지고 몸이 떨린다. 고개가 숙여지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가해자는 상대가 내 밑에 있음을 바로 실감한다.
“월급에서 깐다” “당신 쉰(살)이야?” “이게 어디다 대고” “사무장 그 새끼 오라고 해”…. 조 씨 자매는 유독 상대의 수치심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수치심에 몸서리치는 사람은 빠르게 망가진다.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를 피할 수 없다. 매사에 확신이 약해져 성과는 떨어진다. 폭언은 더 강해진다. 더 이상은 당하지 않으려 퇴근 후에도 뭘 잘못했는지 스스로 캐묻는다. 강박적인 반추 작업이다. 심리학자들은 “삶을 좀먹는 자기 파괴행위”라고 지적한다. 우울증과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전조 증상이다. 박 전 사무장은 해고를 각오하고 ‘땅콩 회항 사건’을 폭로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다. “죽을 것 같아서 그리고 죽지 못하여.”
혼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사의 갑질은 전염된다. 내가 제압당했듯 더 약한 부하를 재물 삼기 쉽다. 회사에서 받은 모멸감을 집에서 보상받으려 배우자와 자녀를 학대하기도 한다.
갑질은 ‘배둘레햄’(복부비만을 뜻하는 말) 유발 효과도 있다. 상사의 폭언에 시달린 기간이 길수록 체질량지수(BMI)가 비만에 가까워진다. 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진이 2016년 직장인 2363명을 연구한 결과다. 당장의 스트레스 해소가 절박해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부쩍 탐하게 된다. 이들에게 몸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다. 폭식으로 자기실현 욕구를 채운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직장 갑질’은 단순히 일부 상사의 괴팍한 성격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에 따르면 ‘갑질 상사’에게선 나르시시즘(자기애)과 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이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자신의 불완전한 인격으로 타인의 몸과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촌 최철원 사장처럼 “한 대에 100만 원”이라며 야구방망이를 휘둘러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월급에서 깐다”는 폭언을 들으면 월급으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상처가 가슴 깊이 파인다.
경찰 수사를 거치며 조 전 전무의 죄목은 업무방해 하나로 줄었다. 물컵을 던졌지만 사람을 향하지는 않았고, 그가 뿌린 음료수에 젖은 직원들이 뒤늦게 처벌 의사를 포기한 탓이다. 결국 회의 진행을 방해한 죄만 남게 됐다. 하지만 직원들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한 진짜 죄를 그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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