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56)의 자백으로 촉발된 화성 8차 사건 진범 논란이 불거졌다.
8차 사건은 화성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사건이 계속되던 1988년 9월16일 발생했다. 이날 새벽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던 박모양(당시 13세)이 성폭행당한 뒤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듬해인 1989년 7월 경찰은 윤모씨(52)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시 경찰은 범행 수법이 이전 화성 사건들과 다른 점, 방에서 발견된 체모가 윤씨의 것과 일치한 점 등을 근거로 윤씨를 특정했다.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윤씨는 대법원 선고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무기수로 복역하던 그는 20년형으로 감형돼 2009년 8월 출소했다.
이 사건은 30여년 만에 이춘재의 자백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이춘재는 8차 사건을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하고 있고,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옥살이한 윤씨는 ‘경찰의 강압 수사로 누명을 썼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모방 범죄로 결론 난 ‘화성 8차 사건’의 진범은 누구일까.
21일 윤씨를 만나 8차 사건 당시 경찰 수사와 재판, 현재 심경과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재심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 명예를 찾고 싶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윤씨와의 일문일답.
- 화성에는 언제 어떻게 가게 됐나.
▶고향은 화성이 아니다. 집안 사정이 있어 14살부터 화성에서 일하며 혼자 살게 됐다.
- 실례되는 질문이다. 몸이 불편한 상태인데.
▶3살 때부터 왼쪽 다리가 불편했다.
- 8차 사건 때 경찰이 찾아온 상황은.
▶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형사들이 5월부터 찾아왔다. 체모를 뽑아줬다. 처음에는 일하던 곳 사장 직원들 전부 뽑아갔다. 나는 6차례 체모를 뽑아줬다. 처음에 한 번 뽑아주고 잊어버렸다고 해서 몇 번 더 뽑아줬다. 최 형사. 내 생각이 잘 나지는 않는데 아는 분들 말이 형사들이 자주 왔다고 했다. 5명이 돌아가면서 왔다갔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나를 몰래 지켜봤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었다.
- 경찰에 언제 붙잡혔나.
▶ 기억에는 가을쯤. 7월 8월쯤 같다. 사장님, 동료들 6명과 식사하고 있었다. 경찰이 잠깐 가자고 했다. 무슨 일인가 했다. 가보면 안다고 했다. 형님이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주변에 경찰이 쫙 깔려있었다고 한다.
- 체포 후 어디로 갔나.
▶ 곧바로 인근 지구대로 갔다. 잠깐 있다가 별장으로 갔다. 12인승 봉고를 타고, 5명쯤 여러명이 타고 있었던 것 같다. 산을 깎아 만든 곳(별장)으로 기억한다. 최 형사가 몇 마디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억은 가물가물 하다. 이때까지 가혹행위는 없었다. 경찰서로 이동해서 조사실에 들어가서 얼마 뒤 수갑을 채웠다. 8차 범인이라며 수갑을 채웠다. 바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했다. 끝나고 나서 ‘안 맞다’며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조사가 시작됐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기억이 어렵다.
- 경찰 조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나.
▶ 조사 과정에서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 왜 시켰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리가 불편해 되지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못했다. 일어나다 넘어졌다. 그때 누가 발로 찬 것 같다. 3일 정도 경찰서에서 조사받았다. 몇 시간 만에 끝났다고 하는데 3일 가량 받았다.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어떻게 됐을 지는 판단에 맡기겠다. 밥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구타도 있었다. 경찰에서 구타가 없었다고 하는데. 판단에 맡기겠다.
- 체모에 대해 경찰은 뭐라고 했나.
▶ 최 형사가 얘기하는 게 내 체모가 나왔다고 했다. 내가 범인 확률 99.9%라고 했다. 사건 발생 장소에 가본 기억도 없는데 억울했다. 왜 사건 발생 한참 뒤에야 체모가 나왔다고 잡아갔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 족적도 나왔다는데.
▶ 사건 관련 족적을 아직도 보지 못했다. 수사 당시엔 알지도 못하고 나중에야 알았다. 다리가 불편해 왼쪽 신발 앞쪽만 닳는다. 족적이 나왔다면 이런(왼쪽 앞쪽만 닳은 모습) 형태여야 하지 않겠나.
- 피해자 오빠와 지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평소 알고지낸 사이였나.
▶ 피해자 오빠와 지인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이 몇 명 없었다. 오빠를 본 일이 없다. 박양도 모른다. 집 구조도 모른다. 일하던 곳 사장 차를 타고 다니면 지나갈 수 있겠지만 가 본 기억은 없다. 동네를 지나갈 수 있겠지만 집에 간 적은 없다.
- 사건 발생일 지인과 함께 있었는데.
▶ 사건 있었던 날은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잠을 잤다. 일 끝나고 지인과 잤다. 지인이 항소심에서 그런 증언을 했었다.
- 조서에 날인을 하는데. 명확히 조서 내용을 이해했었나.
▶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경찰이 타자를 치면서 맞지 안 맞지만 물어보는데 잠을 못잔 상태로 대답한 것 같다. 지장을 찍으래서 찍었다. 내용 이해를 전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다니다가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수감 중에 글을 배웠다. 초등학교를 수감 중 졸업했다.
- 당시 현장검증은 어떻게 진행됐나.
▶ 현장 검증은 교도소로 간 이후에 검사가 동행한 상태로 진행됐다. 경찰 검찰이 있었다. 당시 보도에 담을 넘었다고 돼 있는데 현장검증에서 담을 넘은 기억이 없다. 다리가 불편하고 수갑에 포승줄까지 하고 있었는데 넘을 수 있었겠나. 160㎝이상 높이로 기억한다, 현장검증 때 담을 처음 봤다. 다리가 불편하다. 솔직한 심정으로 넘어보고 싶다. 일반 사람도 넘기 힘들거다.
-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의 도움은 없었나.
▶ 변호사는 못 봤다. 1심에서 구형을 받았지만 변호사는 없었다. 국선 변호임 선임됐다고 하는데 전혀 보지 못했다. 2심에서도 못 봤다. 3심은 서류 재판이어서 변호사 얼굴을 본적이 없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 항소심부터 억울함을 주장한 이유는.
▶ 1심에서 억울하다고 못 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이 재판 과정을 듣고 사형일거라고 했다. 범행을 시인해야 사형은 면할 수 있다고 했다. 1심 끝나고 검사에게 재수사를 요구했다,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잘 아시는 분이 항소장을 써줬다. 증인이 필요하다고 설명해줬다. 같이 잠 잔 사람의 항소심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 복역 중 재심 신청을 고민했을 것 같은데.
▶ 복역 중에도 재심을 해보려 했다. 교도관에게 말을 했는데 어렵다고 했다. 확정 결과를 뒤집을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다들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시도를 할 수 없었다. 사건이 이미 종결되고 새로운 증거가 없었다. 억울했지만 재심을 시도할 명분이 없었다.
- 20년 정말 긴 시간이다. 교도소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생활했나.
▶ 원주교도소에서 몇년 생활하다 청주교도소에 있었다. 종교의 힘으로 버텼다. 교도관들, 교화위원들이 힘이 됐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도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받고 버틸 수 있었다.
- 출소 후 생활은.
▶ 수감 중에 도움 준 이들이 청주에 있어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억울하고 분노해봤자 내 손해였다. 살면서 폭발할 수 없었다. 하소연한다고 들어줄 데가 없었다. 그만한 사건에 연루돼 긴 세월을 살고(복역) 나왔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그럴거다.
- 트라우마도 있을 것 같다.
▶ 왜 없겠나. 화성 사건이 나올 때마다 모방범죄로 8차 사건이 늘 거론됐다. 보기도 싫고 고통스럽다.
- 최근 8차 사건에 대한 이춘재 자백이 있었다.
▶화성 사건 범인이 잡혔다는 애기를 들었다. 얼마 뒤 8차 사건 얘기가 나왔다. 나는 아니다. 이춘재의 자백으로 희망은 생긴 상태다.
- 진범 논란이 빚어진 이후 당시 조사했던 경찰이나 검찰, 법원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나.
▶전혀 없다.
- 조사받을 당시 ‘이근안’이라는 이름을 듣거나 얼굴을 본적이 있나.
▶ 당시 이름을 들어보거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사진도 봤는데 모르는 얼굴이다. 최근에서야 이근안 이라는 이름을 알았다.
- 당시 경찰들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단에 맡기겠다. 이제라도 진정성 있게 사과해줬으면 좋겠다.
- 재심 과정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 박준영 변호사와 매일 연락하며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재심 이유는 하나다. 내 명예를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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