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8차’ 윤씨 “죄수라는 낙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뉴시스
  • 입력 2019년 10월 22일 12시 00분


살인범에 대한 사회의 편견, 종교의 힘으로 극복
처음엔 기초수급자로 살았지만 이젠 조금이라도 기부
“세례명 '빈센치오' 처럼 베푸는 삶 살고 싶어요”

화성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모(52)씨는 2009년 청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된 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죄인’이라는 낙인이 무서웠다. 가족을 볼 면목도, 부담을 주기도 싫었다. 사회는 아직까지 출소자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출소 후 나와 갈 곳이 없었다. 성한 몸도 아니었다.

윤씨는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매우 불편하다”며 “출소 후 사회에 나왔을 땐 막막했다. 세상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고 10년 전을 떠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윤씨의 왼쪽 다리는 팔뚝보다 가늘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가 좌우로 휘청거렸다.

윤씨는 출소 후의 삶은 힘든 나날이었지만, 교도소에서 만난 교도관과 교화위원들이 큰 힘이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들의 도움으로 출소 후 청주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6개월 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면서 한동안 교도소에서 알게 된 교화복지회에 신세를 졌다”며 “한때 취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생의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지만, 종교의 힘으로 이겨냈다”고 말했다.

출소자 신분으로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사회는 출소자에게 한없이 냉랭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화를 내면 윤씨의 손해였다.

살면서 폭발할 수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긴 세월을 복역하고 나온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성 사건이 나올 때마다 모방범죄로 8차 사건이 늘 거론됐다. 보기 싫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럴 때마다 종교의 힘으로 견뎌냈다.

교도소에서 큰 힘이 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교화복지회를 통해 따듯한 격려와 위안을 받으며 힘든 나날을 이겨냈다.

윤씨는 종교를 통해 직장생활과 신앙생활,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윤씨의 억울한 옥살이와 사회에 대한 분노, 증오의 서슬 퍼런 응어리는 차츰 풀어지며 용서와 관용의 따뜻한 가슴으로 자신도 모르게 바뀌었다.

윤씨는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교화복지회에 기부 하면서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내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이런 기회가 생긴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남들과의 약속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신뢰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오길 10여년, 차츰차츰 화성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때쯤 화성 8차 사건에 대한 유력 용의자인 이모(57)씨의 자백이 나왔다.

이씨 자백 후에도 언론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던 윤씨는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무서웠어요. 겨우 정착한 삶이 다시 무너질까봐. 이제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잃어버린 청춘보다 명예를 되찾고 싶어요. 명예를 되찾는다면 남은 인생 세례명 ‘빈센치오’처럼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제 와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저를 수사한 경찰관의 진정 어린 사과입니다.”

윤씨는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A(13)양의 집에 들어가 A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이듬해 10월 1심 선고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경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주장했으나 상급심이 받아들이지 않아 20년간 옥살이를 했다. 사건 발생 31년이 지난 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 이씨는 윤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화성 8차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재수사에 나선 경찰도 당초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화성 8차 사건을 이씨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냈다.

피해자의 얼굴도 모르고, 집도 가본 적이 없다는 윤씨는 이씨 자백 후 박준영 변호사 등의 도움으로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재심 상대는 31년 전 윤씨 검거로 특진한 경찰관들이다.

【청주=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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