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송치재 ‘숲 속의 추억’ 별장 인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도피 중 측근에게 맡겨둔 가방에서 무허가 권총 5자루가 발견돼 그 사용처와 구매 경로를 두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검찰은 무허가 권총 5자루를 발견하고도 경찰에 최근 사용 흔적, 구매 경로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지 않아 각종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또 유 전 회장 사인을 추적하는 경찰은 검찰이 언론에 “총기 감정을 경찰에 공식 의뢰했다”고 흘리면서도 실제로는 압수한 권총을 넘겨받지도 못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인천지방검찰청(인천지검)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팀은 8월 11일 오후 유 전 회장의 도피를 도운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 신도 ‘김엄마’ 김모(59) 씨의 친척 집에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권총 5자루와 현금 15억 원이 든 가방 5개를 압수한 사실을 공식 확인하고 8월 12일 오후 압수품들을 언론에 공개했다.
검찰이 압수한 가방에는 ‘2번’ ‘3번’ ‘6번’ ‘7번’ ‘8번’ 띠지가 붙었는데, 총기류는 ‘7번’ 띠지가 붙은 가방에 들어 있었다. ‘2번’ 띠지 가방에는 5만 원권 현금 다발로 10억 원, ‘6번’ 띠지 가방에는 5억 원이 무더기로 담겨 있었다. 5월 27일 검찰의 순천 송치재 별장 재수색 당시 통나무 벽 비밀공간에서 발견한 가방에는 ‘4번’ ‘5번’ 띠지가 붙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한화 8억3000만 원, 미화 16만 달러가 각각 들어 있었다.
수사 의지 없는 ‘수상한 행보’
검찰의 이번 압수수색은 그동안 유 전 회장의 도피를 도운 사실을 일절 부인했던 김씨가 8월 9일 “유 전 회장이 4월 말 금수원에서 도망가기 전 가방을 은밀한 곳에 보관하라고 해 친척 집에 맡겼으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는 진술을 확보한 게 단서가 됐다. 검찰은 당일 김씨의 친척 집을 방문해 별다른 수색 과정 없이 가방들을 넘겨받았으며, 발견 당시 가방은 접착테이프로 꽁꽁 동여매인 상태였다.
검찰은 5월 27일 발견한 ‘4번’ ‘5번’ 띠지가 붙은 가방과 8월 9일 발견한 ‘2번’ ‘3번’ ‘6번’ ‘7번’ ‘8번’ 띠지 가방에 든 돈이 총 2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미뤄 ‘1번’ 띠지 가방이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또한 ‘9번’ ‘10번’ 가방이 더 있으리라는 가정하에 유 전 회장이 도피를 위해 총 30억 원의 현금을 확보해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8월 9일 15억 원 현금과 함께 발견된 권총 5자루의 사용처와 구매 경로 등에 대해 검찰이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는 데다 경찰에 총기 감식도 공식 의뢰하지 않고 마치 한 것처럼 언론에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불거졌다. 통상 검찰, 세관 등 사정당국이 불법총기류를 발견하면 그 즉시 경찰청에 총기류 감식을 공식 의뢰하고 해당 총기에 의한 강력범죄 발생 가능성부터 타진하게 된다. 총기류의 정확한 제원, 사용처, 사용자, 반입 경로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총기류에 대한 지문 감식과 화약흔 반응시험도 포함된다.
총기류에 대한 감식은 총포·도검·화약류 등 단속법 규정에 따라 경찰이 전담하며,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와 총포관리계가 1차 감식을 맡고 필요에 따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밀 감식을 의뢰할 수 있다. 반면 검찰에는 총기류 감식 시설이나 인원이 없어 경찰에 감식을 의뢰하는 게 상례다. 그럼에도 검찰은 8월 9일 권총 5자루를 입수한 후 8월 14일 현재까지 경찰에 이들 권총에 대한 정밀 감식을 공식 의뢰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검찰은 8월 11일 오후 언론에 “김씨의 친척 집에서 찾은 가방 안에서 권총 5정을 발견했으며, 경찰에 제원 확인을 의뢰한 결과 권총 1정은 사격선수용 4.5mm 공기권총이고 2정은 제조연도를 알 수 없는 구식권총(18세기 수석총의 일종), 나머지 2정은 가스총이었다”고 정보를 흘렸다. 이는 즉각 각 언론에 보도됐다. 하지만 경찰에 제원 확인을 의뢰했다는 검찰 관계자의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 검찰이 권총 종류를 확인한 곳은 경찰이 아닌 경찰청 산하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총포협회)였다.
총포협회 관계자는 “8월 11일 오전 검찰 수사관이 권총 5자루를 보여주며 종류를 알아봐달라고 해서 대충 눈으로 보고 대략적인 종류만 알려졌을 뿐이다. 권총의 자세한 제원이나 사용 흔적, 실제 사용 가능성, 인마(人馬)살상 가능성 등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했는데 그게 마치 경찰이 확인해준 것처럼 언론보도가 나갔다”고 해명했다.
총포협회에 따르면 권총의 최근 사용처와 오래된 사용 흔적, 인마살상 능력, 지문 감식 등은 자기 쪽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경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측에 공식 총기 감식을 의뢰해야 한다. 하지만 이헌상 인천지검 2차장 검사(공보관)는 8월 12일 오후 비공개 브리핑에서 “총기 감정 결과는 언제쯤 나오느냐”는 출입기자의 질문에 “총포협회에서 상당 기간 걸린다고 했다”고 말했으며, 발견된 권총과 유 전 회장 사망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는 “권총을 사용한 흔적이 없다. 말하기가 어렵다”고 답했다.
권총 정밀 감식 필요한 까닭
이에 미뤄보면 검찰은 총기 감식 주체를 경찰이 아닌 총포협회로 혼동하고 있으며 권총 사용 흔적 부분에 대해서도 총포협회의 육안 검사만을 거쳐 답을 내버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권총 사용 흔적이 없다”는 말은 결국 유 전 회장의 죽음과 이번에 발견한 권총 사이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단서 하나가 나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해야 하는 관행을 검찰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총포협회 관계자는 “권총의 최근 사용 흔적은 우리가 감정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실제 20여 분 만에 권총들을 회수해 가버려서 간단한 검사조차 하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권총들은 실제 살인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일까. 검찰은 유 전 회장이 4월 말 금수원을 빠져나가면서 호신용으로 권총들을 가방에 챙겼다가 김씨에게 맡겼으며, 김씨와 그 친척은 권총들이 든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은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가방에서 발견된 권총들이 유 전 회장뿐 아니라 다른 범행에 사용됐을 가능성을 거의 배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검찰은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증하자 8월 13일 오후 권총 자체에 대한 감식을 하지 않은 채 경찰 관계자를 검찰로 불러 지문 감식만 벌였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의 사인을 수사하는 경찰 관계자는 “검찰이 공개한 자료와 사진을 보면 가방 안에서 공기권총 탄환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쇠구슬과 뭉뚝한 납탄이 함께 발견된 데다, 구식권총도 탄환만 있으면 충분히 인마살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권총들은 유 전 회장의 사인을 밝혀줄 주요 증거품 가운데 하나다. 지문 감식이라도 제때 제대로 했다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는데 정밀 감식도 없는 상태에서 언론에 공개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밝혔다.
경찰이 이처럼 유 전 회장의 사망과 권총 정밀 감식에 신경 쓰는 이유는 유 전 회장이 4월 23일 금수원을 빠져나온 후 행적 때문이다. 김씨는 4월 23일 이후 유 전 회장이 신도 집 2곳을 거쳐 5월 3일 순천 별장으로 갈 때까지 줄곧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유 전 회장이 순천으로 가기 전 경기 안성시 한 단독주택을 은신처로 사용하려고 준비한 정황도 드러났다. 또한 유 전 회장이 5월 3일 순천 별장으로 내려가면서 맡긴 가방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김씨의 증언일 뿐, 그의 증언을 뒷받침해줄 물증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점도 의혹의 단서가 된다.
총포협회 관계자는 “공기권총의 경우 먼 거리(10m 이상)에서 쏘면 위력이 없지만 가까이에서 쏘면 충분히 살상 가능성이 있다. 장난감총도 가까이에서 쏘면 위험하다. 구식권총은 중세 유럽에서 쓰였던 총으로 보이는데 그냥 장식용인지 실제 사용한 적이 있는 살상용 수석총(燧石銃)인지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천지검 한 관계자는 “유 전 회장이 살해됐다면 신도 집에서 돈이 그대로 발견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타살 혐의점이 없다”는 기존 수사결과 발표를 되풀이했다.
한편, 검찰이 권총에 대한 감식과 수사를 끝내 경찰에 의뢰하지 않을 경우 이들 무허가 권총 5자루의 불법유통 경로를 밝히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8월 11일 오후 무허가 권총 발견 소식에 관세청과 경찰, 군 등 총기류의 불법유통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 관련 기관 담당자들은 바짝 긴장했던 게 사실. 특히 불법무기류의 밀수 창구로 알려진 부산항을 담당하는 부산본부세관은 행여 수사의 칼끝이 자신들을 겨냥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발견 권총 모두 치명적
총포·도검·화약류 등 단속법에 따르면 사람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총포류는 관할 경찰관서장에게 허가를 받고 경찰서 무기고에 영치했다, 사냥 등 합법적으로 허용된 곳에서 사용할 때만 허락을 받고 가져갔다가 지정 기간 내 반납하게 돼 있다. 유 전 회장은 구원파 신도를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몇 차례나 “내가 사격용 총을 갖고 있는데 쏴보니까 잘 들어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문제는 유 전 회장이 경찰 당국의 허가를 받아 사격 선수만 소지할 수 있는 권총을 어떻게 구매했느냐는 점이다.
검찰이 가스총이라고 밝힌 권총 2자루도 유통 경로가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가스총 2자루는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에서 가스가 분출되는 개인 신변보호용 가스분사기가 아니라 장약 힘으로 탄(고무충격탄, 최루탄)이 발사되는 치안목적용 가스발사총으로, 사법권을 가진 공무원만 경찰의 허가를 받아 소지할 수 있다. 주로 쓰는 고무충격탄은 비록 탄두가 고무라 해도 근거리에서 급소에 맞을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경찰청 총포관리계 관계자는 “검찰 관계자로부터 총기 감식 절차를 묻는 전화는 받았지만 실제 감식 의뢰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발견된 권총에 대해서는 우리도 총포협회를 통해 들은 내용밖에 알지 못한다. 검찰이 경찰에 총기 감식을 의뢰하고 제원을 확인했다는 일부 보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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