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인근 분수광장에서 9일 ‘세월호 속에 있는 9명의 실종자를 꺼내주세요’ 피켓을 든 허흥환 씨(51)에게 한 시민이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이틀 전 대통령은 “세월호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지만 허 씨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인양이 확정되기 전에는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허 씨는 수없이 쏟아지는 같은 질문에 계속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허 씨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364일째(14일 기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딸 허다윤 양(단원고)의 아버지다.
“사고 후 1년이 지났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우리는 1년 전 그날에 멈춰 있어요. 아직 못 찾았으니까.” 허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45)가 말했다. “어머니를 찾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이영숙 씨의 아들 박경태 씨(30)도 아직 끝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1년이나 지났다고 말하는데 나는 믿기지가 않아.”단원고 양승진 교사의 부인 유백형 씨(54)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월호 참사가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갈 때도 이들은 가족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 다양하게 바뀐 삶의 모습
지난 몇 개월 동안 실종자 가족들의 삶은 크고 작은 변화의 연속이었다. 양승진 교사의 아들(26)은 올해 초 대기업에 취직했다. 입사할 때도, 수습사원 생활을 마치면서도 평가 성적 1등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실종자를 꺼내주세요’ 피켓을 들고 있던 유백형 씨는 잠깐 짬을 내 떡집에 백설기를 주문했다. “우리 아들이 1등을 했거든. 떡이라도 돌려야지.” 올 2월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서 찍은 가족사진에는 유 씨와 아들, 딸 모습만 담겼다. 유 씨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딛고 번듯하게 취직한 아들이 기특하기만 하다.
이영숙 씨의 아들 박경태 씨는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지낼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제주도에서 어머니를 혼자 기다린다. 제주도의 유명 호텔식당에서 일했던 이 씨는 부산에서 일하는 아들이 제주도로 파견 와 함께 지낼 집을 구해놓고 세월호로 짐을 옮기던 중이었다. 박 씨는 마음이 아파 차마 그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집을 구했다.
박영인 군의 형(21)은 올해 말 군입대를 앞두고 있다. 영인 군 아버지 박정순 씨(47)는 둘째 아들 영인이를 기다리느라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넨 큰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실종자 가족에게는 청천벽력 같았던 지난해 11월 11일 세월호 수색 종료일은 큰아들의 수능시험 일주일 전이었다. 아침에는 작은아들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엎드려 통곡하던 영인 군 어머니 김선화 씨(45)는 저녁에는 큰아들을 돌보러 안산으로 올라갔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던 영인 군의 형은 혼자 씩씩하게 공부하고 있다.
허다윤 양의 언니(21)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새벽에 집을 나가 밤늦게 돌아온다. 동생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는 부모에게 손 벌리기 싫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쓴다. 큰딸은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부모는 광화문광장으로 아침마다 흩어졌다 저녁 늦게 얼굴만 잠깐 마주친다. “소박했던 가정이 없어져버린 거야.” 쓸쓸하게 중얼거리던 허 씨는 지난해 12월 일터를 잃었다.
동생 권재근 씨와 조카인 권혁규 군을 기다리는 권오복 씨(61)는 수색 종료 후에도 진도를 떠나지 않고 팽목항에 머물고 있다. 매운 바닷바람이 팽목을 덮쳤던 지난겨울에도 흔들림 없이 진도를 지켰다.
보금자리를 바꾸거나 416 가족대책위 일을 맡은 이들도 있다. 단원고 조은화 양의 어머니(46)는 416 가족대책위 대외협력분과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단원고 고창석 교사의 부인(37)은 친정과 가까운 지역으로 전근 가 생활하고 있다.
○ 욕설도 참고 견디는 가족들
실종자 가족들이 광화문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2월 말부터다. 세종시에서 열린 2차 인양회의에 참석한 뒤 다음 회의를 기다리던 실종자 가족들은 인양을 촉구하려고 직접 광장으로 나왔다. “기술 검토가 진행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도 우리한테는 아무 말이 없더라고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광화문으로 나왔다는 박 군의 어머니 김 씨는 매일 오전 9시면 안산을 출발해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가 오후 3시면 다시 안산으로 내려간다.
광화문광장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에게는 스쳐가는 단 몇 초지만 매일 네다섯 시간씩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가족들에게는 그 시간이 절실하면서도 때로 두렵다. “시체 장사 그만하라고!” 무섭게 소리치는 사람들, “이제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을걸”,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은 가족들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한 실종자의 어머니는 피켓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사람들이 가까이 올 때마다 두려운 듯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그래도 피켓을 드는 이유는 ‘아이를 찾아야 하니까’ 이 한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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