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강원 지역 산불로 집을 잃은 김길래 씨(68·여)는 사고 이틀 만인 6일 대피소인 강릉시 옥계면 한 마을회관에서 시청 직원에게 읍소하듯 말했다. 김 씨는 건강 문제로 일을 할 수 없는 30대 아들을 홀로 돌보며 농사로 생계를 이어왔다. 시청 직원은 컨테이너로 된 이동식 주택(23m²·7평)이나 소형 아파트(50m²·15평)에 입주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김 씨는 막막하기만 했다. 김 씨는 다음 달 모내기철에 맞춰 집 앞의 밭에 감자를 심어야 해 집 주변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다. 김 씨는 “집 근처에 살려면 컨테이너가 낫긴 한데 너무 좁고, 아파트로 가자니 너무 멀어서 내 아픈 무릎으로는 오갈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 씨처럼 이번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은 약 530명.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미분양 아파트를 한 달 이내에 제공하기로 했지만 대부분 농사를 짓는 이재민들은 집 가까이에서 살 수 있는 컨테이너 주택을 선호한다. 하지만 컨테이너 주택을 만드는 데까지 3개월가량 걸려 이재민들은 당분간 머물 곳을 찾아야 한다.
이재민 상당수는 생계의 터전까지 잃었다. 강릉 옥계면에 사는 유모 씨(55)는 15년째 운영하던 양봉장이 통째로 불탔다. 벌통 102개에 있던 1억 원가량 하는 꿀벌 약 200만 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6일 유 씨의 양봉장은 꿀벌들이 검은 재에 뒤덮인 채 엉겨 붙어 있었다. 꿀 수확 시기를 한 달 앞두고 모두 타버려 유 씨는 당장 이달 치 생활비마저 마련하기 어렵게 됐다.
▼ 연기 뚫고 탈출한 임신부“배 속 우리 아기 어떡해” 잠 못이뤄 ▼
강원 고성군 산에서 더덕 같은 약초를 캐 내다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차광주 씨(56) 역시 답답한 심정을 호소했다. 이번 강원 지역 산불의 여파로 캘 약초가 모두 타버린 것. 차 씨는 “약초는 벼와 다르게 몇 년을 기다려야 캘 수 있다. 귀한 약초는 10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이제 어떻게 먹고사느냐”고 했다.
강원 산불 이재민 중에는 지병이 있는 노인 등 노약자가 상당수다. 이들은 연기를 마시거나 대피하다 부상을 입고도 제대로 치료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고혈압 치료제처럼 꼭 먹어야 하는 약을 집에 두고 와버린 경우도 많다.
○ 연기 마신 임신부 “우리 아기 어떡해요”
6일 고성군 임시대피소인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서 만난 김모 씨(78·여)는 산불이 집에 옮겨붙자 연기를 피하려고 기어서 탈출하다 돌에 부딪혀 다리가 멍투성이다. 김 씨는 “아직도 다리가 저려 잠을 못 이룬다. 사고 이후 혈압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고 말했다. 강릉시 옥계면에 사는 정모 씨(73)는 “신장(腎臟)이 좋지 않은 아내는 처방받은 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데 약이 다 타버려서 이틀을 못 먹었더니 그새 얼굴과 몸이 부었다”고 말했다.
2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 후 유모차 비슷한 보행보조기구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는 고성군 주민 김모 씨(84·여)는 급히 뛰어서 대피하느라 허리 통증이 극심해졌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지만 거동이 힘들어 병원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임신부와 산모들은 당장 아기 건강이 걱정이다. 임신 6개월 차인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 이모 씨(26)는 4일 불붙은 집에서 황급히 빠져나온 후 식사를 거의 못 하고 있다. 6일 속초의 한 대피소에서 만난 이 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서워요” “우리 아기”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 씨는 대피할 때 들이마신 연기가 혹시나 태아에게 악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돼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남편 변모 씨(39)는 “집이 다 타버려 아기가 태어나도 살 곳이 없을까 봐 하루하루 불안하다”고 말했다.
생후 12일 된 아들을 안고 탈출한 베트남 출신 도티구잉 씨(35)는 출산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채로 대피소에서 이틀을 보냈다. 신생아까지 자녀가 넷인 그는 “연기를 마셔서인지 복부에 통증이 있다”고 말했다.
○ “눈만 감아도 불길 떠올라 잠 못 자”
화재 당시 받은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피해도 크다. 6일 대피소인 옥계면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봉연 씨(73·여)는 당시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주먹을 쥔 채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눈만 감아도 그때 불타오르던 게 떠올라 한숨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고성군 토성면의 김모 씨(68·여)는 “누가 내 앞에서 담배만 피워도 무서워서 피한다”고 했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은 이 지역 이재민들이 수십 년을 살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려 일반 화재 피해자보다 충격이 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옥계면에 사는 한 노인은 심리상담 전문 자원봉사자에게 “6·25전쟁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와서 60년 넘게 살아온 집이 타버렸다. 아버지가 남겨준 것을 못 지켰다”며 2시간가량 흐느꼈다고 한다. 대피소인 속초 청소년수련원에서 심리 상담을 하는 이승우 속초시 여성청소년과 계장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주민들은 스스로를 죄인처럼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다.
이재민의 고통은 크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방안에 대한 홍보가 미흡하다는 불만도 나온다. 각 대피소에서는 긴급복지나 주거 지원을 안내하고 있지만 가구 규모와 소득 수준에 따라 지원액이 달라지는 등 내용이 복잡해 나이 든 이재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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