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건물은 지난해 7월 소방점검을 받았다. 지적사항은 단 2건. 소화기 압력 조정과 휴대용 비상등 교체 같은 사소한 문제였다. 소방점검을 실시한 사람은 당시 건물주 박모 씨(58)의 아들. 그는 소방안전자격증 보유자였다. 소방 당국은 별다른 이의 없이 점검 결과를 수용했다.
1년 뒤 건물주는 이모 씨(53)로 바뀌었다. 이어 지난달 소방점검이 실시됐다. 무려 67건의 지적사항이 나왔다. 화재 감지기와 경보기, 스프링클러 등 방화시설 대부분이 불량이거나 관리 부실이었다. 1년 4개월 전 완벽에 가깝게 안전했던 건물이 갑자기 위험천만한 건물로 바뀐 것이다. 두 차례 점검 결과를 살펴본 한 소방 전문가는 “소방설비 수십 개가 1년 사이 동시에 망가지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지난해 점검이) 부실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건물주 심기 건드리지 않는 게 중요”
화재 예방에 필수적인 소방점검은 현재 대부분 민간위탁으로 진행된다. 건물주가 돈을 내고 맡긴다. 솜방망이 점검, 봐주기 점검이 만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5일 동아일보 취재팀이 접촉한 소방점검 업체들은 “건물주 입맛을 고려한 ‘맞춤형 점검’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심각한 문제도 가벼운 걸로 축소하거나 아예 눈감아주는 것이다. 업체가 비용을 아끼려 자격 미달의 값싼 인력을 동원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A 씨(55)는 서울에서 10년 넘게 소방점검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그는 서울 도심의 한 건물을 점검했다.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만난 건물주는 다짜고짜 “내용을 확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갑(甲)’의 요구였다. A 씨는 점검 결과를 손에 쥐고 고민에 빠졌다. A4 용지 5쪽 분량의 결과서에는 어림잡아 100건 가까운 지적사항이 담겨 있었다. 결국 그는 ‘소화기 안내 표시 미부착’ 등 대부분의 항목을 빼고 20건 안팎의 지적만 남은 결과서를 건넸다.
또 다른 점검업체 관계자 B 씨는 건물주의 요청을 받기 전에 알아서 조치한다. 그가 직접 점검했던 한 건물의 경우 소화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소화기 비치 불량은 중요한 지적사항이다. 하지만 B 씨는 직접 모자란 소화기를 구입해 갖다 놓았다. 그러고는 ‘이상 없음’으로 처리했다. 방화문은 항상 닫아놓아야 한다. 만약 ‘말발굽(문 고정 장치)’을 달면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하지만 B 씨는 늘 “꼭 제거하시라”는 구두경고로 마무리한다. B 씨는 “건물주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음 검사 때 업체를 바꾸려고 할 것이 뻔하다.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점검 중 “좋은 게 좋은 거지” “오래오래 함께 갑시다”라는 건물주의 말은 압력이나 다름없다.
서울 종로구의 한 건물 관리인은 “어차피 계약하고 가장 편한 일정에 맞춰 점검한다. 평상시에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비상시에 대비한 소방점검을 서로 의논해서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당구장 주인은 “건물주가 불러서 점검을 하긴 하는데 소속이 어딘지도 모르고 누군지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이곳에 있는 소화기 최종 점검 일자는 7년 전으로 표기돼 있었다.
○ 점검은 보조가, 관리사는 해외로
이런 상황에서 소방점검 업체의 도덕적 해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소방점검에는 규정상 소방시설관리사 1명과 보조인력 2명을 투입한다. 하지만 점검 서류를 미리 만들어놓고 보조인력만 현장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점검 당일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소방 당국 단속에 적발돼 처벌받은 관리사도 있다. 충북의 한 점검업체 관계자는 “관리사 중 과태료 한 번 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용을 아끼려고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하는 업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현행법상 관리사 1명에 보조인력 2명이 투입되면 하루 최대 1만2000m²까지 점검할 수 있다. 여기에 보조인력을 1명씩 추가할수록 3000∼3500m²씩 대상 면적이 늘어난다. 업체들은 물량을 늘리기 위해 자격 미달 인력을 고용한다.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에는 ‘소방점검 알바 구한다. 학력 자격 따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자주 올라온다. 업체 관계자는 “보조인력을 정규직으로 쓰면 2000만∼3000만 원은 줘야 하지만 알바는 일당 5만 원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점검업체가 난립하면서 ‘저가 경쟁’이 부실 검사를 부추기고 있다. 한 점검업체 대표는 “과거 인맥으로 알음알음 검사했는데 요즘은 공개입찰로 업체를 고르다 보니 덤핑이 심하다. 3, 4년 전보다 점검 비용이 30∼40% 낮아졌다”고 말했다. 이번에 불이 난 스포츠센터의 소방점검 비용은 80만 원이었다. 전문가들은 “해당 건물 규모를 고려할 때 최소 150만 원 이상이어야 정상 검사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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