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바로 이것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5일 03시 00분


[잊지 못할 말 한마디]서현(건축가)

서현(건축가)
서현(건축가)
착하게 살라는 것인지 구도를 하라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선(禪)의 정신. 어스름한 기억 속 강의 제목이 그러했다. 나는 나만큼이나 불교에 관심이 없던 고등학교 동창을 끌고 가 계단강의실 맨 뒷줄에 함께 앉았다.

왜 대학교에서 그 강연을 마련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불교학생회 정도에서 초청을 했던 행사였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 지식은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나오는 정도가 전부였다. 불교의 흥기와 쇠락 수준이었다. 그런 신입생이 포스터에 끌려 강연장에 앉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며칠 전 법정 스님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에 비춰 나는 분명 쓸데없이 많이 가지려 들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말씀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님은 책 속 인상과 많이 달랐다. 목소리는 칼칼했고 문장은 툭툭 끊겼다. 이 풍진 세상을 착하고 슬기롭게 살라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묵언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내용이었다. 생마늘과 날쑥을 되통스럽게 던져놓는 듯했다. 알아서 씹어 먹으라고.

스님이 던지는 쑥, 마늘을 견디다 못한 친구는 중간에 동굴 같은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내게도 강의는 따분했지만 나는 좀 더 미련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반전은 후반전에 있었다. 던져놓은 이야기들을 스님이 엮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속에서 잠수함이 떠오르듯 이야기는 구조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을 통해 이를 수 없는 세계에 관한 그림이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것이 바로 선의 세계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스님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떤 확신이 저런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그 문장에는 아무런 군더더기도 유보조항도 없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번민의 사바세계에서 이처럼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정신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이것이라고 대답하기 위해서는 물을 수 있어야 했다. 질문이 필요했다. 물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했다. 내 입은 침묵하여도 귀에 들릴 말과 눈으로 읽을 글이 필요했다. 나는 불립문자가 아니라 문자천지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나는 불도가 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고 속세의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었다. 도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세상이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세상은 이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데 덜고 걷어내도 좋을 것들은 많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저 말에서 꼭 필요한 단어가 무엇인가를 정리하려 드는 습관은 아마 그때 생겼을 것이다.

책 속의 글을 곱씹고 먹고 소화시켜 다 배설하고 최후까지 몸에 붙어 남은 것이 입을 통해 튀어나왔을 때, 그 문장은 깡마르게 간명해질 것이다. 불가에서 문자를 버린 용맹정진 후에 튀어나온 이 문장을 일컫는 단어가 사자후일 것이다. 수식도 주저도 없는 그 문장. “바로 이것이다.”

스님은 말빚을 청산하겠다며 쓰신 책을 절판시키고 가셨다. 그러나 이미 읽고 들은 자의 머릿속까지 헹궈 낼 길은 없겠다. 몇 해 전 법정 스님의 다비식을 텔레비전 너머로 보면서 대학 신입생 시절이 생각났다. 어두운 강의실에서 마늘과 쑥이 아니고 비수로 날아왔던 스님의 마지막 문장이 다시 기억났다. 아니 번득였다. “바로 이것이다.”


서현(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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