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리 (The best is yet to be)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3일 03시 00분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故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언론학)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언론학)
나의 20대는 힘들었다. 10대에 온다는 질풍노도기가 20대에 온 것처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온 청년에게 서울은 녹록지 않았다. 거리에 돌멩이가 난무하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던 시절, 뭐하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없었다. 금빛 꿈을 안고 온 스무 살 젊음에게 서울은 너무 살벌하고 쓸쓸하고, 나는 몹시 외로웠다.

그래서 20대 시절 읽었던 책을 보면 괴로워했던 소감이 머리 부분에 갈겨져 있다. ‘상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등이 눈에 띈다. 주로 개인적인 고통을 긁적거린 낙서들이다. 무엇이 힘들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괜찮은 낙서도 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시인 네크라소프의 한마디다. 남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불만투성이 청년으로 변해갔다. 사랑도, 과외도, 병역문제도 어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다. 그저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다 하숙집에 처박혀 강의를 빼먹거나 신도시가 된 교외선 백마역에 있던 데카당한 술집으로 가서 며칠간 죽치고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우연한 전기가 찾아온다. 1980년대는 총칼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의 시대였다. 당시 정권은 군부 권력이라는 멍에를 희석하기 위해 묘안을 짜낸다. 그중의 하나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을 정부에 영입하는 것. 삼고초려 결과 김 총장은 당시 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총장은 이임식에서 평생을 보낸 대학 식구들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떠난다.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습니다. 희망을 잃지 말고 빛나는 미래를 기다립시다.” 나는 이 할머니의 한마디가 당시 군부정권에 신음하던 한국인에게 던지는 메시지인지 단순히 이화여대 식구들에게 던진 인사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방송을 통해 그 한마디를 접하는 순간 문득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지, 내 인생에서도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겠지. 더 좋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월간 ‘신동아’에 게재된 전문을 찾아 읽던 나는 이 한마디가 시구절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이 구절을 찾기 위해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은 브라우닝의 시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날 이후 이 한마디는 나를 감싸는 거대한 금언이 된다.

나는 예외 없이 학기 첫 강의시간에 나눠주는 강의계획서 끝에 ‘The best is yet to be’라는 한 구절을 슬쩍 넣어둔다. 더러는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지만 결국은 수강생 중 누군가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그럴 경우 그 한마디의 의미를 뭉클한 맘으로, 내심 기다렸다는 듯이 들떠 설명해 준다. 그런 설명을 하는 나는 이미 20대 능금빛 청춘으로 돌아가 있다.

왔다고 느낄 때쯤이면 저만치 떠나가는 가을이 깊어간다. 올 한 해도 이제 끝물에 가깝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한때는 성장을 의미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하나둘 잃는다는 의미가 되었다. 어젯밤 주고받은 얘기조차 가물가물하고 눈은 하루가 다르게 침침해진다. 다음 날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실체적인 이유 때문에 대여섯 잔을 사양 않던 폭탄주는 한두 잔에 손사래를 친다.

산타클로스를 철석같이 믿다가, 믿지 않다가, 스스로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다. 말이 줄어드는 계절, 행복해 보이는 그 누군가도 깊어가는 가을에는 허전하고 쓸쓸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나는 돌아가신 김 할머니의 한마디를 기억해 낸다. 그의 온유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언론학)
#김옥길#질풍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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