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쪽팔림’이 10년을 좌우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4일 03시 00분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중학교 상업 선생님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내 중학 시절에 관해 써보고자 한다. 3학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새로운 과목이 생겼다. 상업이다. 1년간 나를 비롯한 3학년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 상업을 공부해야 했다. 상업 교과서는 온통 숫자투성이였다. 낯선 단어들이 즐비했다. 이를테면, 자산, 부채, 어음 같은 용어들이다.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반발심도 있었다. 주요 과목을 공부하기도 바쁜 와중에 저걸 배워서 어디다 쓴단 말인가. 입시에 도움이 안 될 게 뻔한데. 우리는 암묵적으로 생각했다. 대충 하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업을 담당한 선생님이 정말이지 특이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특이했느냐. 그에게는 ‘어떤 용어를, 쉽게 알아듣도록 정확한 어휘로 재조합할 줄 아는 능력’ 같은 게 있었다. 필시 그는 우리의 심리를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과서를 줄줄 읽어봤자 학생들이 귀 기울이지 않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색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는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전부 구호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입찰매입-구입에 대해서는 최저 가격을 제시한 업자에게 낙찰하여 계약하는 것이 원칙이다’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면, 직접 동작과 구호를 외치며 따라하도록 했다. 입찰은 오른손을 번쩍 들며 해당 단어를 외치고, 매입은 왼손을 들게 했다. 그래서 매입은 사는 것, 사는 이가 한 명, 파는 이가 다수, 이런 식으로 어절마다 양손을 번갈아 들며 구호를 외치게끔 했다. 지면의 제약으로 설명이 번다해졌지만 한번 해보면 간단하다. 개념이 금방 머릿속에 들어온다.

모든 학생들이 한 명씩, 교실 앞으로 나가 구호를 외쳤다. 처음엔 무척 창피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작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실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는 우리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순간의 ‘쪽팔림’이 10년을 좌우합니다.”(‘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금성사 가전제품 광고가 회자되던 때다) 당장은 여러 사람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게 창피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기억해 두면 오래 남는다는 뜻이었으리라. 확실히 그의 교수법에는 묘한 감화력이 있었다.

효과는 전국 모의고사에서 나타났다. 다른 과목과 달리 상업 성적은 우리 학교가 전국에서 톱이었다. 압도적인 점수 차였다. 앞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는 것은 여전히 창피했지만, 그렇게 학습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해에 치른 네 번의 모의고사에서 우리는 대부분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순간의 ‘쪽팔림’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을 다양하게 변주해 써먹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때, 주의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 앞에 나서야 할 때, 혼자 속으로 되뇌곤 했다. ‘한 번 창피하고 말지 뭐.’ 이 말은 내성적인 성격의 나에게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언젠가 동아일보에서 기사화한 책 광고의 노출 사진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찍었다. 내 의도와 달리 선정적이라고 욕도 먹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흔히 ‘도전정신’이라 불리는 자세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전제품 광고를 패러디한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동기를 유발하는 에너제틱한 힘이 담겨 있었구나, 하고 이 글을 끼적이며 새삼 감탄하는 중이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쪽팔림#순간#10년#중학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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