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10년 동안 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내가 TV 드라마를 쓰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침 보충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새벽별을 보고 출근해야 했고, 저녁 보충을 끝낸 뒤 종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제대로 본 드라마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 남몰래 글쓰기를 연마하며 드라마 작법을 공부한 것도, 드라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교직을 그만둔 뒤 우연히 라디오 심야 프로 스크립터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사생결단, 연애며 결혼이며 육아까지 포기하거나 보류하면서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고 있는 후배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니까 시절이 좋았고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뜻하지 않게 드라마 작가가 된 뒤에도 좋은 운은 계속되었다. 전직이 교사였다는 이점으로 ‘개구쟁이 철이’ ‘억척선생 분투기 ‘호랑이 선생님’ ‘고교생 일기’ 같은 어린이, 청소년 드라마를 연속으로 쓸 수 있었다. 그 뒤 ‘물보라’ ‘뜨거운 강’ ‘빛과 그림자’ 같은 성인물로 옮겨갔는데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목욕탕에서 전날 밤 방영된 내 드라마의 내용에 화내고 슬퍼하고 흥분하는 시청자들을 보면서 ‘아, 나는 드라마 작가가 천직이구나, 진즉 드라마 작가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참담한 실패에 직면하기 전까지 나는 드라마 작가로서의 내 재능을 의심치 않았다.
1980년 중반에 방영된 ‘타인’이라는 드라마 첫 연습 때 고 김순철 선생님이 “이 선생, 이거 이거 예감이 좋은데. 대박 나겠어”라는 기분 좋은 덕담까지 해 주셨다. 하지만 5회째부터 뭔가 뜻대로 안 됐다. 간신히 6회를 써 보낸 뒤 7회부터 아예 쓸 얘기가 없었다. 50회 주말 연속극에서 초반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한 신도 건지지 못한 채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원고를 대지 못하면 방송 펑크였다. 잠시 어렵게 눈을 붙이면 어김없이 배우와 스태프가 원고가 없어 녹화를 못하는 악몽을 꾸었다.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시간 내에 원고를 보내야 하는 강박감은 입속에 침을 마르게 했고, 심장이 오그라들어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재주 없음에 절망하고 절망했다.
‘타인’은 간신히 50회를 채우고 끝났지만 시청률도 바닥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실패작이었다. 이 드라마의 참담한 실패 이후 더는 드라마를 쓸 용기가 안 났다. 재기가 불가능하다 싶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단막 한 편 쓰지 못한 채 2년을 방황했다. 결국 심각하게 드라마 작가를 그만둘 결심을 했다.
그 무렵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고 적힌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친구인, 지금은 고인이 된 ‘혼불’의 소설가 최명희가 보내준 엽서였다. 한참 동안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으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드라마에서 도망치려 애쓰고 있던 나에게 ‘이대로 도망치는 건 비겁하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나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작품은 ‘타인’ 이후에 나온 것이다. 아직도 나는 작품을 쓰는 동안 절망한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조국사 지눌의 법어를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른다.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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