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로 1만여 명이 사망했던 1920년 한반도. 당시 전남도의 방역 담당자는 ‘경무휘보(警務彙報)’(일제 조선통감부 경무총감부에서 발행한 월간지)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질병과의 전쟁 외에 (주민들의) 미신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2015년 대한민국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와의 전쟁 외에 불신, 불안, 공포, 소문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처럼 100년 전 조선인의 모습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감염병의 확산, 격리 조치 대상자의 반발, 정부의 미흡한 방역 조치, 불안과 공포심의 확산까지 당시 사회상은 현재와 닮아 있다.
격리를 거부하는 두 남자
12일 오후 5시경 서울 강남구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 앞. 메르스 검사를 받은 A 씨(42)가 간이진료소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간호사가 붙잡으러 뛰어오자 그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사람이 아프면 치료를 해줘야지! 나 지금 집으로 갈 건데, 내가 확진자면 바이러스 다 전파하면서 집에 가는 거야!”
A 씨는 다음 날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지난달 27일 부친의 삼성서울병원 외래진료에 동행한 게 화근이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엔 지난달 27∼29일 메르스 14번 환자(35)가 입원하면서 감염자가 발생했다. A 씨는 현재 서울의료원에 격리돼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95년 전에도 방역작업을 놓고 비슷한 풍경이 연출됐다. 1920년 8월 16일 오후 6시경 경성(京城·서울의 옛 이름) 종로4정목(현 종로4가) 파출소 앞. 경관들과 한 남성이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의 옆엔 들것을 든 인부가 있었다. 경관이 말했다.
“여기서 걸어가면 병균이 퍼지니 들것에 타시오.”
그러자 남성이 대꾸했다. “내 몸이 이렇게 멀쩡한데, 걸어가라면 가도 들것은 안 타겠소!”
들것에 타기를 거부한 남성은 종로구 인의동에 살던 최영택 씨(당시 47세). 일주일 전 설사병으로 고생하던 아내를 잃은 사람이었다. 아내를 검시(檢屍)한 경찰은 최 씨의 검체도 가져갔다. 최 씨의 아내가 콜레라 환자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는 치사율 50%에 달하는 콜레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경찰은 최 씨가 보균자라 주장하며 격리병원인 순화원에 데려가려 했지만, 말다툼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파출소 앞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인근 주민 1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주민들은 외쳤다.
“죽어도 들것엔 타지 마라!” “조선 사람은 아무렇게나 죽어도 괜찮단 말이냐! 성한 사람을 잡아다 괴질구혈에 넣으려는 경관을 때려 죽여라! 파출소를 부숴라.”
경관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 씨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자 최 씨는 “지금 수백 명 군중이 몰려 있어 겁이 나서 보내놓고 밤이 되면 슬며시 데려가려는 것 아니오?”라고 따졌다. 군중은 맞장구를 치며 “옳다. 참 그렇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라”라고 소리쳤다. 경관들은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10여 명의 경관을 추가로 파견했다. 그러자 군중은 흥분해 돌을 던져 파출소 유리창을 깨뜨렸고, 경관 한 명은 머리를 다쳤다. 경관들은 칼을 빼어 들고 군중을 진정시킨 뒤 최 씨를 돌려보냈다. 폭동은 한참 뒤에야 잦아들었다. 하지만 경관과 시민의 충돌은 그달 17일, 19일에도 계속됐다. 정부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騎馬) 순사까지 동원해야 했다.
최 씨는 결국 순화원에 끌려 갔지만 끝내 검진을 거부했다. 그가 정말 콜레라 보균자였는지는 지금도 확인할 길이 없다.
100년 전과 지금의 소문들
‘우선 이 정보는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 제약 관련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이 알려준 겁니다. 중동 출신 전문가가 알려준 방법! 신종플루나 메르스를 피하는 가장 쉽고 싼 방법은 바로 바셀린을 콧속에 바르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독감 감기 비염 등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도 콧구멍에 바셀린을 바른다네요.’
메르스 확진자가 속출하던 2일, 직장인 박모 씨(59)가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받은 메시지다. 박 씨는 이 밖에도 ‘양파가 바이러스 포집 능력이 뛰어나니 방마다 양파를 5개씩 놓아라. 양파를 한 포대 방에 보관한 집에만 독감 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메시지들은 모두 의학적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로 판명 났다.
100년 전에도 감염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둘러싸고 근거 없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총독부의 ‘다이쇼 9년 호열자병 방역지’(1921년)에 따르면 많은 조선인들은 전염병이 귀신이나 악마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콜레라균이 일으키는 소화 계통의 전염병인 ‘콜레라병’을 ‘몸속에 쥐가 들어가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환자가 경련을 일으킬 때 쥐를 죽인다며 바늘로 환자의 몸을 찔러 상처를 내거나, 고양이 모양의 떡을 만들어 먹이곤 했다. 환자가 발생한 집 근처 화장실에 불을 질러 병마를 쫓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경관이 감염병 환자를 발견할 때마다 돈을 받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 사람당 5원을 받는다더라’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제시됐다. 이 때문에 방역 당국은 1920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해명을 실었다. ‘경찰서에서 병자를 발견한다고 한 푼이라도 금전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 … 이러한 소문이 난 이유는 이들이 방역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역당국에 대한 불신은 왜 커졌나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보건당국의 방역에 협조하며 메르스를 이겨내고 있다. 하지만 1920년 조선인은 그럴 수 없었다. 방역 사업의 주체가 ‘경찰’이었고, 일제강점기 경찰의 강압적인 활동이 시민들의 불신을 키웠기 때문이다.
현재 보건소에서 담당하는 방역 작업을, 조선총독부는 ‘위생경찰제도’를 도입해 경찰에게 맡겼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이 제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행해진 특수한 사례였으며, 일반 관리보다 경찰 위력을 통해 격리 조치를 손쉽게 할 수 있기에 도입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경찰이 환자를 죄수 다루듯 하고 검역 조사가 중범죄자 수색보다 엄격하다”며 경찰의 강압적인 방역 활동을 비판했다.
감염병을 치료하는 시설이 열악했다는 점도 주민들 사이에 공포를 키웠다. 경성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순화원은 고작 100명의 환자만 수용할 수 있었다. 하루에 발생하는 콜레라 환자만 100여 명에 이르던 때였다. 이 때문에 치료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순화원은 사실상 지켜만 보는 ‘격리 시설’에 가까웠다.
조선인들은 병원에 갔다 약 한 방울 얻어먹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격리가 곧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박 교수는 “보균자인지 아닌지 애매한 상황에서 병원에 가면 죽는다는 시각 때문에 저항이 더욱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20년 전남도 방역 담당자가 ‘주민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던 이유는 결국 그들 속에 있었다.
‘당국자는 조선인의 위생 사상이 발달하지 못한 것을 비판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격리병원을 꺼리고 전염병자가 도망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번 방역사업에서 당국이 사람들의 원망을 사게 된 것은 (조선인들의 위생 사상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당국이 적절한 소통(선전)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20년 8월 21일자 1면) ▼ 감염병 격리 조치의 역사 ▼
흑사병 의심 선원들 40일간 격리… 균 옮기는 쥐들은 못막아
메르스 감염을 막기 위해 격리된 사람들이 1만5134명(26일 기준)까지 치솟았다. 감염병이 발생하면 이뤄지는 격리 조치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검역은 영어로 ‘쿼런틴(Quarantine)’이다. 이탈리아어로 숫자 40을 뜻하는 ‘콰란타(Quaranta)’가 어원이다. 14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흑사병 감염자가 배에서 내려와 병을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40일 동안 배에서 선원들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예수가 광야에서 금식한 기간(40일)을 본떠 실시했던 ‘40일 격리 조치’가 곧 검역을 의미하게 됐다.
하지만 ‘쿼런틴’으로도 흑사병을 막지 못했다. 격리된 것은 배에 탄 선원들이었을 뿐, 정작 균을 옮기는 쥐들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흑사병의 원인이 쥐벼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를 뽑고 오줌 목욕을 하는 등 온갖 미신으로 흑사병을 이겨보려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 집시, 특히 유대인을 흑사병 원흉이라며 경멸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전염병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전염병이 생길 때마다 인간은 큰 두려움에 휩싸였고, 환자에 대한 격리는 그 해답처럼 따라다녔다. 한때 ‘문둥병’으로 불렸던 한센병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당시 의술로는 이들을 치료할 수 없었기에 조선총독부는 1916년 전남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만들었다. 육지와 떨어진 섬 안, 외부와 단절된 격리시설이었다.
한센인에 대한 격리가 시작됐음에도 한센인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근거 없는 낙인 찍기는 계속됐다. ‘한센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1926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엔 경북 영천군에 살고 있는 어린이 김석이(당시 12세)가 대구천으로 헤엄치러 가자는 ‘나병환자 같은 자’ 3명의 말을 거절했다가 죽음을 당할 뻔한 이야기가 실렸다. 석이가 고함을 치자 사람들이 달려왔고, 환자들은 곧 달아났다. 기사 말미에는 “문둥병에 어린애 살점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그렇게 흉행(兇行)을 하려 한 듯하다”는 분석이 덧붙었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영양이 부족해서 피부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도 때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격리되기도 했다”며 “격리 조치가 차별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센인의 부부 동거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정부가 낙태와 단종수술(斷種手術·유전성 환자의 생식 기능을 없애는 수술)을 자행했던 것도 일종의 차별이었다.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었음에도 1990년도까지 정부는 법률적 근거가 없는 수술을 강제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에이즈 환자에 대한 격리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에이즈는 수많은 음모를 만들어냈다. ‘에이즈는 마약 중독과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동성애와 매춘에 대한 신의 처벌’이란 얘기가 나돌았을 정도였다. 1992년 한 신문의 사설은 ‘새 환자의 발생을 최소화할 방법으로 에이즈 환자를 가려내 격리 수용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치명적인 에이즈의 위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곧 인권침해란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당시 정부도 에이즈 감염자의 격리 수용 의사가 없었다. 이동모 당시 보건사회부 보건국장은 “감염자를 격리 수용할 경우 당사자들이 잠적해 오히려 에이즈가 음성적으로 더 확산되고 대부분 감염 우려자들이 에이즈 검사를 기피해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94년 7월 31일자)
2015년 대한민국엔 과거와 같은 ‘무분별한 격리 조치’는 없지만, 환자에 대한 차별과 비난은 여전히 남아 있다. 메르스 93번 환자(64·여)가 중국 옌볜 출신임이 드러나자, 인터넷에선 ‘메르스 확산의 주범은 불법체류 외국인’ ‘조선족들은 메르스 걸리면 한국인에게 퍼뜨리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일부 메르스 환자들은 감염병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감염병에 대한 공포는 문명 이전부터 있던 근본적인 것”이라며 “감염병 환자들이 안전을 위협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극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염병의 문화사’의 저자 아노 카렌은 “새로운 풍요의 시대는 생물학적 재적응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인간 질병의 역사는 대부분 그러한 적응의 역사이다”라고 말한다. 메르스의 여파를 겪고 있는 지금도 새로운 적응을 하기 위한 역사가 진행 중인 셈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