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어투 사이로 간간이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난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가 폐에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 목소리가 변했다. 80명 넘는 환자에게 메르스 바이러스를 옮긴 ‘슈퍼 전파자’. 당국이 ‘14번 환자’로 관리했던 A 씨(36)는 11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바이러스가 몸에서 빠져나간 지 1년이 흘렀지만 아직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A 씨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만큼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퇴원 당시 30kg가량 빠졌던 몸무게도 거의 회복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손상된 폐를 치료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는데 최근 피검사에서 후유증이 남아있다는 소견을 받고 좀 놀랐다”고 말했다.
메르스를 앓은 환자는 대개 섬유화 현상으로 인해 폐가 딱딱해지는 부작용을 겪는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설전을 벌이고 증상이 악화됐다가 수차례 에크모(몸속의 피를 체외로 빼내 산소를 공급한 뒤 다시 몸 안으로 주입시키는 장치) 시술 끝에 퇴원한 35번 환자(삼성서울병원 의사)도 비슷한 부작용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5번 환자는 심장 및 폐 기능을 높이기 위한 재활치료를 하고 있고 병원에 복귀하기까지 앞으로 1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A 씨는 몸보다 정신적 후유증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감염시킨 ‘14번 환자’라는 사실을 퇴원 직전에 알게 된 충격으로 3개월가량 대인기피와 불안 증세를 겪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고 약도 복용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는 죄책감이 심했다”며 “‘메’자만 봐도 신경이 불안하고 예민해져 지난해 임신한 아내와 가족을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정부를 향한 원망도 남아 있었다. A 씨는 “정부 당국자가 나에게 메르스 확산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 화가 많이 났다”며 “메르스가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내가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됐다. 나도 피해자인데 가해자처럼 비치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A 씨는 지난해 8월 재취업하면서 차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채용 업무를 담당할 정도로 자신감을 되찾았다. A 씨는 “혹시 면접자가 내가 ‘14번 환자’라는 걸 알아볼까 봐 두렵지만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치료 이후에도 고통을 겪고 있을 다른 완치자들도 힘을 내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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