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예고된 비극…조직적 증거인멸, 공무원도 가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3일 21시 58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을 재수사한 검찰이 유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책임자인 SK케미칼 및 애경산업 전 대표 등 34명을 재판에 넘겼다. 2011년 피해 발생한 지 8년 만이다. 이들 기업은 유해성을 검증하지 않은 채 제품을 출시했고, 사고가 발생한 뒤에는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무원이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내부 자료를 넘긴 사실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 안전성 검증 없던 ‘예고된 비극’…재수사로 34명 기소

23일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부장검사 권순정)는 약 8개월의 수사 끝에 유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의 홍지호 전 대표(68) 등 8명을 구속 기소하고,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60) 등 2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2016년 1차 수사 때는 21명이 기소된 데 이어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모두 55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정부가 추산하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19일 기준으로 6476명이다. 이 가운데 1421명이 사망했다.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 등 16명은 유해물질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을 원료로 ‘가습기 메이트’ 등을 제조·판매하면서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아 소비자들을 사망 또는 상해에 이르게 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상)를 받고 있다. 2016년 당시에는 CMIT·MIT와 피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수사대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이후 유해성에 대한 학계 조사 결과가 축적되고 환경부가 관련 연구 자료를 검찰에 제출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검찰은 제품 개발 단계부터 안전성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1994년 유공이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하는 과정에서 서울대 이영순 교수팀에 의뢰해 흡입독성 시험을 의뢰했지만 시험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가습기 살균제 판매를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서울대의 ‘흡입독성 시험 보고서’와 연구노트 등에 따르면 안전성 검증을 위해 추가 시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케미칼은 2000년 유공으로부터 가습기 사업을 인수해 2002년부터 애경산업과 제조·판매 업무를 재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안정성 검증은 이뤄지지 않았다. 고객들로부터 혹시 인체에 유해한 것이 아니냐는 문의를 받고도 회사 측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흡입독성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원료로 공급한 SK케미칼 전 직원 4명도 재판에 넘겨졌다. PHMG는 2016년 수사에서 유해성이 확인됐지만 당시 SK케미칼 직원들은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사용되는지 몰랐다”고 주장해 수사를 피했다. 하지만 검찰 재수사 결과 PHMG를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소개하고 관련 실험도 진행한 사실 등이 확인됐다.

● 조직적 증거인멸…공무원도 가세

기업들은 문제가 불거진 뒤 증거인멸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SK케미칼의 박철 윤리경영부문장(52·구속)을 비롯한 이 회사의 임직원 5명은 2013년 정부부처의 조사가 시작되자 서울대의 흡입독성 시험 보고서를 숨겼다. 고광현 애경산업 전 대표(62·구속) 등 애경산업 임직원들은 2016년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

환경부 서기관 최모 씨(44)가 애경산업에 환경부 국정감사 자료와 ‘CMIT/MIT 함유 가습기 살균제 건강영향 평가 결과보고서’ 등 각종 내부문서를 준 혐의(공무상비밀누설)도 새롭게 포착됐다. 최 씨는 대가로 수백만 원 상당의 금품과 향응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는 애경산업 직원에게 “검찰 수사가 시작될 거 같으니 압수수색에 대비해 자료들을 삭제하라”며 증거인멸을 교사한 혐의도 받고 있다. 사건과 관련된 기업인 소환 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돈을 받고 로비활동을 벌인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 양모 씨(52)도 구속기소됐다.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아쉬운 뜻을 나타났다. 특조위는 “진상규명 방해 행위자를 적발해 기소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면서도 “다른 성분을 사용한 제조업체와 옥시 영국 본사, 외국인 임직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밝혔다.

황성호기자 hsh0330@donga.com
김동혁기자 h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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