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알아차린 독자도 있겠지만 이 글은 장 자크 루소의 책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의 형식을 빌렸다. 가상의 루소가 현실의 장 자크 루소를 심판하듯 가상의 철수가 현실의 안철수를 심판한다.
‘단일화는 헤게모니 싸움’ 인식 부족
―안은 사퇴하면서 영혼을 팔지 않았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철수: 괴테의 희곡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인생 최고의 향락을 맛보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파는 계약을 맺는다. 안이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영혼을 팔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길 만큼 어렵게 물리쳤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은 무엇일까. 안은 정치로 가는 다리를 건넜고 그 다리를 불살랐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안에게 그 유혹은 단일화의 약속을 깨고 끝까지 가서 국민 지지의 결말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안이 아니라 문이 양보할 수도 있었을까.
철수: 문이 양보하는 순간 민주통합당은 대통령이 나눠줄 수 있는 1만 개의 자리만 놓치는 게 아니라 당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제1당은 아니지만 127석을 지닌 강력한 제2당이다.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선 패배가 분명한 3자 대결도 각오했을 것이다. 3자 대결이 되면 그 책임은 어차피 안이 뒤집어쓰게 돼 있다. 안만이 양보냐 아니냐의 선택지(選擇肢)를 갖고 있었다. 안이 지게 되어 있는 치킨 게임이었다.
―안은 단일화에 응하지 말았어야 했나.
철수: 단일화에 응한 것이 실수가 아니라 단일화를 한다고 시한까지 못 박아 약속함으로써 퇴로를 없앤 것이 실수다. 안은 정치개혁이 단일화의 상위 개념이라고 했는데 이 약속 때문에 단일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포기하는 모순에 빠졌다. 약속에 충실했으나 약속을 맺은 이유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에 대비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단일화는 환상이었나.
철수: 단일화 협상은 클로즈업이 아니라 롱샷으로 보면 야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즉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보는 세력과, 역사에서 공과(功過)를 다 배우겠다는 자세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의 묘역을 모두 찾을 수 있는 세력과의 싸움이었다. 친노와 원탁회의로서는 대권을 놓치더라도 물러날 수 없는 싸움이었으나 안의 머릿속에는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
―안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眞心)이라고 생각한다. 선의가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국민과 증명하려 한다”고 말했다. 안의 진심 정치는 통하지 않은 것인가.
철수: 진심 정치는 근대 정치의 틀에 도전하는 야심찬 탈(脫)근대적 기획이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진심 정치는 안의 지지도에서 보듯 어느 정도 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안이 단일화 협상에서 처음으로 추상적 국민이 아닌 구체적 정치세력과 마주했을 때 진심은 무용지물이었다. 안이 문과 친노세력에게 배신감을 느꼈다는 데서 작가 카프카의 말이 생각난다. 선은 악을 모르지만 악은 선을 안다.
앞으로 신당 창당의 正道 걸어야
―안이라는 태풍은 소멸하는가.
철수: 소멸은 아니고 약화된 저기압으로 대선 때까지 간다. 문이 대선에서 패하면 그 저기압은 다시 커질 수 있다. 안은 대선 때까지 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지지하지 않기도 곤란한 딜레마에 빠졌다. 이번 대선이 안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긴 했지만 하늘은 무소속 후보의 성공이라는 요행을 허용치 않았다. 안이 정치인으로 계속 남는다면 길고 힘들더라도 신당 창당의 정도를 걸어라. ‘국민이 원하면’이란 애매모호한 말 대신 자신의 판단을 말하라. 소통도 중요하지만 옳다고 여기는 일은 설사 그것이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을 때도 밀고나가는 뚝심을 보여라. 강의식 말투를 버리고 순발력 있는 언어를 배워라. 그것이 안철수 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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