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를 시험 평가 기준에 넣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교육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 말은 실은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입시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국어 영어 수학은 수능 필수 과목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그렇지 않다. 대학과 전공에 따라서는 국어 영어 수학 중 일부를 보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국사만 수능 필수 과목으로 만든다는 것이 적절한가.
대학입시는 자율화로 가고 있다. 대학은 원하면 국사 수능 점수를 요구할 수 있다. 서울대가 그렇다. 더 많은 대학이 원하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대도 국사 때문에 우수한 학생을 뺏기고 있다고 여겼는지 국사를 필수 과목에서 제외하려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대통령의 말이 나오자 없던 일로 했다.
대학입시 과목에 넣어야만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단순하다. 고교 사회탐구 과목은 현행 교육과정에서 원칙적으로 모두 선택과목인데 국사만 필수과목으로 바뀌었다. 물론 국사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굳이 국사 교육을 더 강화하려면 교육시간을 늘리면 된다. 국사를 반드시 배워야 하니까 시험을 치고 그 결과는 내신에 반영된다. 수능만 평가라는 생각은 내신을 중시해 입시에 반영하도록 한 교육 이념과도 맞지 않다.
국사의 수능 필수화는 애당초 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교육부는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라는 해괴한 발상이 나왔다. 수능일 전에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라는 것을 봐서 ‘통과’와 ‘비통과’만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시험을 따로 운영한다는 것도 번잡한 일이지만 언어능력평가시험도 아니고 역사능력평가시험이라니 외국 언론의 토픽감이다.
수능이든 내신이든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든 시험을 봐야 국사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잘못됐다. 국사를 포함해 모든 역사 교육은 암기 과목이 되는 순간 실패하도록 돼 있다. 프랑스 파리 특파원 시절에 한 영국인 강사가 프랑스인 청중에게 자기 나라 국사 교육을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사는 “요새 아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잘 모른다”며 “히틀러가 화가인 줄 아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우리와 달랐다. 그는 “영국의 교육이 맥락에 대한 지식 없이 선다형 문제에 답하기 위해 이뤄지고 있어 그렇다”면서 프랑스식 논술형 문제에 부러움을 표시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고교시절 선생님이 있다. 국사는 아니고 세계사 선생님이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1980년 무렵의 서울 변두리 공립학교는 엉망이었다. 학생들은 머리 기르게 해달라고 학교 유리창을 부수고 다녔다. 교사들도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자습을 시키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도 간혹 세계사 선생님이 들어와 들려주신 강의가 잊혀지지 않는다. 주군과 봉신의 계약관계를 중심으로 한 중세 봉건제에 대한 설명, 중세와 프랑스혁명 사이에 낀 절대주의 시대의 의미,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 조공무역의 의미를 그때 들었다. 시험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후에 역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비록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국사 시험을 본 세대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국사로 평가받길 원하지 않는다. 일본 국사교과서는 왜의 가야 지배를 가르치고 중국 국사교과서는 조선을 속국처럼 표현한다. 우리 국사교과서가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다.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초중고교의 국사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교묘하게 사실에 눈감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국가의 일원으로 사는 이상 국사를 배우지 않을 권리까지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사로 평가받지 않을 권리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로니컬하지만 진정한 국사는 고교를 벗어나야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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