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의 장성택 처형을 정치학 이론이나 저널리즘적 접근으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장성택은 김정은에게 실질적 위협이 돼서 처형된 것일까. 오히려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간단히 제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전개된 사태와 더 잘 맞아떨어진다. 장성택의 몇몇 심복이 처형되거나 망명하긴 했지만 장성택 라인은 대체로 건재하다. ‘위협-제거’라는 상투적 틀이 여기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
공개체포 나흘 만의 전격적인 장성택 처형이 알려지자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것이라느니 김정은 정권 붕괴의 서막(序幕)이라느니 하는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장성택 처형은 2인자 없는 김정은 유일 영도 체제의 완성을 알리는 것인지 모른다.
장성택이 스펙터클(spectacle)한 처형의 대상으로 뽑힌 것은 그가 백두혈통(김일성 가계) 내에서 차지한 애매모호한 위치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혈통에서 고모부와 이모부는 언제든지 배제될 수도, 포섭될 수도 있는 경계선상의 가족이다. 장성택은 이전에도 숙청됐다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장성택은 어린 김정은을 위해 김정일이 특별히 예비한 희생제물, 곧 처형되기 위해 만들어진 2인자였을 수 있다.
김정일은 죽기 전 여동생 김경희와 매제 장성택 그리고 후계자 김정은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으면 경희와 매제가 정은이를 돌봐라. 정은이 너도 믿을 것은 고모와 고모부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를 대하듯 고모와 고모부를 모셔라.” ‘건성건성 박수를 친 오만불손한’ 장성택은 이런 유훈이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경희와 장성택을 돌려보낸 후 김정은만 몰래 따로 부른다. “장거리 미사일 시험과 3차 핵실험 준비를 해뒀다. 그걸로 너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라. 그리고 나의 탈상(脫喪) 전에 장성택을 죽여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수령임을 보여줘야 한다.”
중국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유훈을 돌에 새겨 황실 깊숙이 숨겨놓았다. 황제가 되는 사람만이 유훈을 볼 수 있었다. 그 석각처럼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남긴 비밀 유훈이 있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김정은뿐이다. 그것을 저널리즘적으로 추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니 익숙한 신화적 내러티브(narrative)에 따라 상상해볼 뿐이다. 갓 서른 김정은의 뒤에 공포정치의 달인 김정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유훈통치를 실행하고 있다.
현실과 이념에서 모두 정당성을 상실한 체제는 공포에 의해서만 지탱할 수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전(前)근대 시대 공포를 조장해 인민을 통치하는 방식의 하나인 잔인한 공개처형의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장성택의 처형은 정확히 말하면 공개되지는 않았다. 회의 도중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장성택의 모습과 판결문 끝의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다’는 말만 보였을 뿐이다. 때론 보이는 처형보다 보이지 않는 처형이 더 무섭다.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화염방사기로 태워 없앴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흉흉한 소문은 그 공포의 크기를 보여준다.
죽은 김정일과 산 김정은이 추구한 것은 신화적 공포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이나 ‘해리 포터’의 볼트모트가 주는 것과 같은 절대 공포. 그러나 절대 공포의 순간을 만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조울증이 찾아온다. 더이상 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우월감은 뒤집으면 이제 모두가 날 두려워하기만 한다는 낭패감이 된다. 마식령 스키장 개장식에서 조증의 김정은을, 김정일 중앙추도대회에서는 울증의 김정은을 봤다. 김정은이 수령 수습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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