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비극은 비극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끌어낸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가 뛰어난 것은 오셀로의 의심이 오셀로의 비극을 낳은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로 박근혜 대통령 측이 처한 예상치 못한 곤경도 이런 구조를 갖고 있다.
이완구 총리가 사정(司正)의 팡파르를 울렸을 때 느닷없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이 팡파르까지 울리며 사정에 나서는 걸 원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총리가 자신이 익숙한 흘러간 정권의 방식으로 사정을 포장해 내놓은 것은 확실하다. 난 ‘이완구는 총리감이 아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사정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사정을 외칠 때만 해도 한 편의 소극(笑劇)이었다. 칼날이 거꾸로 이 총리와 박 대통령을 겨누면서 그것은 웃지 못할 비극으로 바뀌었다.
성공에 예정된 실패
오셀로는 베네치아의 무어인 용병이었다. 그는 무어인의 자질로 위대한 장군이 됐지만 무어인이었기에 갖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것이 아내를 의심한 비극의 씨앗이었다. 박 대통령에게는 대통령의 딸로 살아온 삶이 성공의 원인이자 지금 처한 곤경의 원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판에 들어왔으나 그 후광에 눈이 부셔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정치는 아무리 아껴 써도 돈이 들어가는 분야인데 그에게만 돈을 써야 돌아가는 현실의 정치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돈에 대해서는 ‘고귀한’ 보스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측근들이 각자 모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 측근들은 그것이 진정한 충성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박 대통령도 영리한 사람이니까 측근들이 부정한 돈을 받는 것은 아닌가 의심은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돈은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측근들도 알아듣는 시늉을 했으니 믿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믿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도 자신이 옷을 입지 않았음을 알았다. 신하들이 다 옷을 입었다고 하니까 입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박 대통령은 ‘나야말로 돈에 대해서는 깨끗한 사람’이 됐다.
잘 만들어진 비극에서는 성공의 정점에서 실패가 시작된다. 박 대통령은 집권 3년 차를 맞아 세월호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경제 활성화와 부패 척결에 시동을 걸었다. 앞의 것 하나도 어려운데 두 가지를 다 하겠다는 것은 좋게 보면 자신감의 표현이고 나쁘게 보면 의욕 과잉이다. 거기서 운명은 예상과 다른 경로로 진행해 성 회장을 불러들이고 비극이 시작됐다. 대통령의 딸인 박 대통령이 아는 정치판과 자수성가한 성 회장이 아는 정치판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두 관점이 부닥치고 진실의 순간이 다가왔다.
대통령이 자초한 레임덕
성 회장의 메모와 인터뷰 내용이 다 맞다고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일부는 똥물을 퍼붓는 심정으로 끼워 넣은 허위일 수도 있다. 문제는 검찰 수사로는 메모와 인터뷰 내용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점이다.
정치자금은 교묘하게 주고받는 것이라 주고받은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사법적으로 입증하기 쉽지 않다. 그게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돈이 오간 사실이 없다고 믿지 않는다. 망자(亡者)가 죽음에서 돌아와 자신의 메모를 철회해 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게 망자의 메모가 갖는 비극적 성격이다. 정면 돌파한다 해도 극복할 수 없다. 박 대통령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사정발(發) 레임덕이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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