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는 자녀가 어떤 한국사 시험을 치르는지 잘 모른다. 2015학년도 수능 한국사 시험 문제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그림 속에 제복을 입은 멋진 교관이 이렇게 말한다. “오랜 투쟁 끝에 ‘본교’가 설립되었고, 다음 달에는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이 출범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한국 독립과 만주 탈환이다. 제군들은 이를 위해 학업과 군사훈련에 힘쓰라.” 해답은 이 본교가 어디인지 알아야 풀 수 있다. 참고자료로 ‘정치학-한일래, 철학-김원봉, 사격 교범-김종, 폭탄 사용법-이동화’라고 쓴 이 학교의 교관 목록이 제시돼 있다.
조선혁명학교까지 알아야?
학생들은 대부분 김원봉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본교’는 그가 1932년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말한다. 김원봉은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다녔고 조선공산당 간부였던 안광천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해 잡지 ‘레닌주의’를 발행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한 적이 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세웠다.
김원봉은 현대사의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그가 택한 노선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그가 안광천과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을 하고 해방 정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한 뒤 북한에서 고위 각료를 지내다 숙청된 사실은 나와 있지 않다. 교과서에도 시험에도 멋진 무장 독립투사 김원봉만 나온다.
수능 한국사시험 문항은 모두 20개다. 2015학년도에는 20개 중 14개가 개항 이후의 근현대사에서 출제됐다. 개항 이전의 전(前)근대사 문항은 조선시대 2개를 포함해 고작 6개뿐이다. 현 한국사 교과서는 근현대사와 전근대사를 50 대 50의 비중으로 다룬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이런 비중은 별 의미가 없다. 학생들이 수능을 보기 위해서는 70 대 30의 비중으로 근현대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 학교에서도 근현대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그제 역사과 교육과정 시안 토론회에서 앞으로 교과서의 근현대사와 전근대사의 비중을 4 대 6으로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옳은 방향이다. 다만 그런 방향을 지향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그동안은 수능이 교과서 비중과는 달리 제멋대로 출제되는 것을 보고는 뭘 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이념편향 극복 어려워
근현대사와 전근대사를 배우는 비율은 50 대 50이 적절하고 근현대사의 비중을 더 높여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외국 역사 교과서에서 전근대사의 비중은 여전히 크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서구처럼 장기간의 의미 있는 근대사를 갖지 못했다. 최근대사인 현대사 서술은 분단된 현실에서 통일이 될 때까지는 좌든 우든 이념적 편향에 대한 비판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근현대사의 비중을 줄여 큰 맥락만 가르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 김원봉의 조선혁명간부학교까지 알아야 하는 현실은 정상적이지 않다.
역사 공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정신과학의 방법인 ‘이해(Verstehen)’는 후자에 더 잘 어울린다. 우리는 지나간 다른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때 다가오는 다른 미래에 대해서도 보다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전근대사를 근현대사 못지않게 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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