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1도 아니고 3분의 2도 아니고 5분의 3도 아니고 2분의 1이다.
언뜻 생각하면 만장일치, 즉 1이 가장 민주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장일치를 추구하다 보면 논의가 길어져 제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또 그 결정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 결정이 가져올 혜택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세상에는 애당초 합의 불가능한 일이 많다. 매사 만장일치는 천국이나 혹은 사이비 천국(공산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적시성과 효율성, 현실가능성을 고려해 따져갈 경우 민주주의의 숫자는 2분의 1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얼마 전 대선 결선투표를 제안했다. 결선투표는 과반의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어느 정도의 표를 얻어야 당선될 수 있는지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초등학교 교실에서 반장 뽑듯이 대통령 후보자 중 1위를 대통령으로 뽑고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민주적 정당성 확보에 문제가 있다.
영국 독일 일본 등 의원내각제 국가는 총선에서 제1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연정을 통해 과반(過半)을 만들어 정부를 구성한다. 과반의 지지를 얻을 때에만 그 정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같은 대통령제 국가는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과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1차 투표에서 1, 2위 득표를 한 후보자만 2차 투표에 진출해 최종 당선자를 가린다. 의원내각제 국가나 대통령제 국가나 실행 방식은 다르지만 사고방식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영어의 머조리티(majority)를 별생각 없이 다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머조리티는 정확히 말하자면 1위 다수가 아니라 과반을 의미한다. 머조리티의 반대쪽, 즉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마이노리티(minority)다. 민주주의는 머조리티의 지배, 즉 머조리티가 마이노리티에 부과하는 강제다.
반대로 마이노리티가 머조리티를 강제하면 그것은 왕정이거나 귀족정이거나 소수당의 독재다. 국회선진화법처럼 5분의 3의 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5분의 2보다는 많지만 2분의 1에는 미치지 못하는 마이노리티가 머조리티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5분의 3은 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反)민주적인 것이다.
미국 상원에는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 절차가 있고 이를 중지시키려면 3분의 2의 합의가 필요하다. 미국만의 독특한 제도다. 이것은 미국 상원이 민주적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미국 와이오밍 주의 인구는 59만 명에 불과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인구는 3914만 명에 달해 약 67배 차이가 난다. 그러나 와이오밍 주도 캘리포니아 주도 상원의원은 똑같이 2명이다. 작은 주들이 연합해 과반을 만들어봐야 민주적인 과반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3분의 2를 요구한 것이다. 인구수에 따라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하원에는 이런 제도가 없다. 마찬가지로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우리나라 국회에도 적용돼서는 안 된다.
우리 헌법은 간혹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한다. 헌법 개정 같은 몇몇 경우가 있다. 3분의 1보다는 많지만 2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마이노리티의 의사를 특별히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경우 그렇게 한다. 국회선진화법은 헌법처럼 미리 정해진 어떤 특정한 사안에 가중(加重) 다수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사안에나 두루 적용되는 일반 절차에서 가중 다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반민주적이다. 헌법재판소가 이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는 데 부정적이던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전향적인 자세로 나왔다. 총선 결과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표를 합치면 과반이 된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정책 유사성도 높다. 더민주당이 국회선진화법으로 19대 국회 내내 국정의 발목을 잡아오다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자 돌아서니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이 이 망국(亡國)의 법을 고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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