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린을 서울시교육감으로 만들기 위해 뛰었던 사람들만의 은밀한 구호다. 대통령은 1번 박근혜를 찍고, 교육감은 2번 문용린을 찍으라고 주변사람들을 독려하라는 뜻이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바닥도 그랬지만 문 후보도 못지않았다. 문 후보의 플래카드는 박근혜의 그것과 색깔이나 디자인이 똑같았다. ‘보수단일후보’도 전면에 내세웠다. 문용린은 박근혜의 ‘아바타’라는 걸 대놓고 호소했던 거다.
문용린 후보는 54% 득표로 너끈하게 이겼다. 진보단일후보 이수호 씨보다 17%포인트나 앞섰다. 서울의 대선 판세는 박근혜 후보가 48%, 문재인 후보가 51%를 얻어 전국 평균 득표와는 거꾸로 나왔는데도 교육감 선거에서는 박의 아바타가 낙승한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문용린은 과연 보수후보라서 당선된 걸까.
2010년 선거에서 이원희가 곽노현에게 1.12%포인트 차로 아슬아슬하게 진 이유는 보수후보 난립이었다. 이번에도 진보는 혼자, 보수는 여러 명이 나왔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통령은 문재인을 찍은 꽤 많은 진보성향의 유권자가, 교육감은 문 후보를 지지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2년 반 만에 일어난 반전의 키워드는 ‘곽노현’이다. 진보인 곽노현 교육감이 실패한 반동으로, 보수인 문용린이 쉽게 이겼다는 분석이다.
분명 문 후보는 보수를 자처해 재미를 보긴 봤다. 그러나 문 교육감은 그리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전교조를 합법화한 DJ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그의 정체성은 모호하다. 망설이다가 전교조 공격에 나섰고, 그마저 당선 후 사과했다. 곽 전 교육감의 핵심정책인 혁신학교도 내치지 못하고 “정책엔 신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수 후보’라는 말에 선입견을 가졌던 기자들이 그를 처음 보고 ‘좀 색다른 보수네’라고 느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보통교육(초중고교육)에는 원래 진보, 보수라는 개념이 없었다. 서울교육감은 문 교육감까지 19대에 걸쳐 16명. 그동안 임명, 간선, 직선을 통해 수장에 오른 이들은 교육자나 교육행정가였다(5·16 군정 당시의 1명만 현역군인이었다). 그중에는 대통령과의 사적 인연으로, 대통령과 같은 지역 출신이어서, 대통령 부인과 고향이 같아서 벼락출세를 한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교육감이 되고 나면 진보나 보수로 분류하진 않았다. 수많은 전교조 교사를 해직시킨 교육감조차 ‘보수여서 그렇다’는 비난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관행이 깨진 게 전국적으론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서울에선 곽노현 교육감이 등장하고부터다.
후보매수 혐의로 구속된 것은 제쳐두고라도 곽노현 교육감은 현장 교육에서 실패했다. 무상급식,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 등 논쟁적인 사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반대도 많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서울은 아주 시끄러운 이념의 실험실이 돼버렸다. 문용린의 승리는 ‘진보인사 곽노현’에 대한 비토라기보다는 ‘곽노현식 교육’에 대한 분명한 레드카드였다. 문 교육감도 ‘보수’라는 평판보다 ‘치우친 보수 교육’에 함몰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년 선거에서 또다시 반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문 교육감이 참모들을 교육청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얼마 전의 일반직 인사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던 K 인사가 거의 전권을 휘둘렀다는 말이 나오는 건 실망스럽다. 교육부 장관을 지낸 데다 떠밀려 출마한 탓인지, 교육감 자리를 약간 내려다보는 듯한 언행도 한다는데 조심해야 한다.
20여 년 전 서울교육청을 3년 이상 내 집처럼 드나들며 취재를 하고 있을 무렵, P 학무국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서울교육청 업무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으냐”고. 대답은 “10% 정도”였다. 서울교육청은 크고, 공무원은 노회하다. 밖에서 온 교육감은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핫바지가 되기 십상이다. 하루를 하더라도 정책 의지는 분명하고, 인사와 상벌은 독해야 한다.
교육계 원로들이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등 문 후보를 응원했던 그룹들도 문 교육감을 풀어줘야 한다. 스스로를 ‘강한 보수’로 규정짓고 문 교육감을 ‘내 편’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의 입지를 좁힐 뿐이다. 문 교육감 입에서 진보보다 보수 쪽 대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와선 곤란하다. 전교조가 너무 왼쪽으로 가버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매우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 교육계 인사나 단체들은 예나 지금이나 중도보수에 가깝다. 그 자리를 지켜야만 어떤 성향의 교육감도 견제할 수 있다.
예전에는 서울교육을 ‘한국교육의 방향타’라고 불렀는데,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교육 소통령(小統領)’이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한국 교육의 성패를 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자부심은 사라지고, 소소한 권력의 맛에 길든 것 같아 걱정이다. 잘하든 못하든 문 교육감 앞에는 1년 6개월밖에 없다. ‘교육 소통령’으로 군림하고 즐기는 데는 짧을지 모르지만 서울교육에서 자극적인 실험실 냄새를 빼고 교육본질로 방향을 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게 보통교육을 잘 알지도 못하는 ‘문용린 교수’를 교육감으로 뽑아준 서울시민의 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