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문고리가 아니라 문짝이 문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8일 03시 00분


정윤회 문건 파동의 본질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권력을 보는 정서의 문제
작은 문고리 3인방, 큰 문고리 비서실장 빼내고 이참에 불투명 문짝까지 갈아야
어렴풋이 사람도 보이고 바람도 통하는 창호지가 좋아 문짝 교체는 대통령만 할 수 있다

직업 덕분에 대통령을 만드는 데 기여한 소위 ‘공신’이나 나중에 발탁되어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대통령 수석, 장관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결같이 자신들이 모셨던 대통령에 대해 놀랄 준비, 감동할 준비, 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이 여러 현안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으면서 적확한 지침을 주는 데 놀라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하는 것에 감동했다. 그러니 대통령과 의견이 다를 경우 자신이 지는 게 당연했고, 모두 그렇게 했다.

약간의 예외가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끔 “우리가 모두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왜 그럴까. 그들이 남들보다 객관적이어서가 아니라 주군이 타계해서 부담이 덜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서 요즘은 공사석 어디서고 ‘직을 걸고 충언을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못할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 공허해서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돌출은 레이저에 너무 많이 노출됐던 씨앗의 돌연변이로 이해하면 쉽다.

정윤회 씨를 둘러싼 문건 파문은 정권의 불행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문건 유출이 아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청와대의 평상시 업무 스타일과 위기관리 능력에 관한 문제다. 이 정권이 숱한 인사참사만 빚지 않았어도 이토록 커질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들은 이 사건을 보며 그토록 궁금했던 인사실패, 인사갈등, 인사지체의 원인이 수첩만이 아니라 십상시의 개입이나 사리(私利)를 탐한 저차원의 권력다툼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한다. 의심은 곧잘 확신으로 변한다. 문건 내용을 보고받거나 유출을 확인한 뒤에 보여준 청와대 비서실의 물렁한 판단과 일처리에도 실망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들이 한결같이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 심지어 아무 직책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불쾌하다. 잘못을 저지르는 데 직급과 직업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세상을 흔드는 것을 보며 모욕감을 느낀다. 사실과 관계없이 대통령과 가까운 비서관이라면 커튼 뒤에서 중요한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은 불만이다. 문건의 내용은 부인하고, 문건 유출만 국기문란행위로 단정했다. ‘찌라시’에 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흔들린 나라는 예전의 그 나라가 아니다. 대통령은 검사가 아니라 정치인이다. 검찰이 대통령의 단언처럼 정윤회 씨나 십상시의 국정 농단이 없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소임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흔들려 버린 나라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책임은 오롯이 대통령의 몫이다.

작은 문고리 3인방은 정리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먼지를 뒤집어썼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찌라시 때문이라 하더라도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끽소리도 못하고 자리를 내놓은 공직자는 셀 수도 없다. 유독 문고리 3인방만 예외로 한다면 ‘비선정치’를 계속하려 한다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없으면 불편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다면 대한민국의 수준을 슬퍼해야 한다.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 대통령이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는 비난은 피해야 한다.

큰 문고리 김기춘 비서실장에게도 ‘자유’를 줘야 한다. 그는 할 만큼 했고 이번 문건 파동에서도 상처를 입었다. 이쯤에서 그를 ‘희생양’ 삼아 비서실을 일신하는 모양새를 취해도 대통령을 비난할 사람은 없다. 기용이 능력이라면 해임의 명분과 시점을 정하는 것은 정치다. 장점도 많고, 기대도 컸던 대통령이 ‘이게 아닌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국민과 싸우려 해서는 안 된다.

문고리를 바꾸는 김에 아예 문짝까지 갈았으면 한다. 검게 선팅된 방탄유리를 뜯어내고 창호지를 바른 문짝으로 말이다. 전부 보여줄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사람의 움직임 정도는 감지할 수 있게 하고, 바람이 통하게 몇 군데 구멍도 뚫어놓고, 계절 따라 버들잎이나 단풍잎도 몇 장 붙여놓으면 좋지 않겠는가. 그게 이 시대의 소통이라고 믿는다.

문짝은 아무나 바꾸지 못한다. 주인의 판단과 식견, 행동에 놀랄 준비, 감동할 준비,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참모들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오로지 주인만이 할 수 있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문고리#3인방#정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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