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한일 수교 50년, ‘향수’와 이별할 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5일 03시 00분


50년 보내고도 갈등이 여전한 건 한일 모두 향수를 버리지 못한 탓
일본은 과거가 영광스럽다는 일그러진 향수를 버리고, 한국은 고분고분한 일본에 멈춘 달콤한 향수를 버려야 할 때
국민감정과 국익이 충돌하면 해법은 지도자의 용기와 결단뿐 판을 바꿀 골든타임이 흘러간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한일 수교 50년이 되는 해를 맞았다. 3년 전쯤만 해도 올해는 기념할 만한 해였다. 수교 50년을 계기로 새로운 차원의 한일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장밋빛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2011년 12월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의 회담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끝나버린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기념할 만한 해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해로 바뀌어 버렸다.

최근 3년간, 일본과 한국은 각자의 거울 앞에서 자기하고만 대화를 해왔다. 일본은 기억하고 싶은 과거만을 기억하고, 선별한 과거만을 현재에 전파하며, 일부의 박수 소리를 응원가 삼아 미래를 얘기한다. 한국은 국민감정에 부합하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를 제시하고, 현재에도 그런 요구가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서 변함없이 과거를 강조한다. 편한 대로 과거를 지우고 미래로 향하려는 일본과,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를 얘기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이에서 현재의 접점은 희미하다. 지금의 한일 갈등이 예전보다 심각한 것은 순방향의 차이가 아니라 역방향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미래를 향한 과거 경시’ 흐름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비정상인 관계를 불편하게 느끼는 일본 국민은 점차 줄고 있다. ‘비정상이라는 지금이 사실은 정상’이라는 말까지 한다. 이런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어온 일본 내의 소위 양심 세력도 급격히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위한 과거 중시’ 태도는 여전할 것이다. 동시에 일본을 보는 눈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한국의 국력 신장이나 중국의 대두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평가에 거품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광복 이후 반공 반일 친미의 프레임 중에서 반공은 종북집단이 출현할 정도로 개벽을 하고, 친미는 반미 데모가 범람하는 시대로 변해 버렸지만, 반일 정서만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있긴 하다. 새해 들어 전문가들에게 냉각된 한일 관계의 해법을 물어본 신문이 많았다. 그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작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이 양보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과 같은 한국의 원론적 태도로는 문제를 풀 수 없으며, 한국의 국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의 제안은 일본의 변화나 양보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다. 얼마 전까지도 이런 말은 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전문가들의 제안은 대개 대통령이나 고위관료 등 의사 결정권자들에 대한 주문이라는 것이다. 의사 결정권자들의 행동과 선택을 구속하는 일반 국민들에 대한 요구는 없다. 여기서 리더십 문제가 대두된다.

일본은 우리에게 필요한가라는 문제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필요 없다’고 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국민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국민감정과 국익이 충돌할 때 국익을 선택한 지도자는 어느 정도의 비난과 상처를 각오해야 한다. 만약 일본이 우리에게 필요 없다거나, 필요는 하되 일본의 변화 없이는 관계 개선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도자가 져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본에 저자세로 나가라는 얘기냐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국민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감정에 매몰돼 국익이 손해를 보는 일을 줄일 수는 있다. 국민감정과 국익이라는 미묘한 경계선 위에서 기다림이 최선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정상회담 없는 정상화를 얘기하고,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합의하라고 권유하며, 정치와 그 밖의 문제를 분리 대응하라고 주문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양국이 좀 더 편하게 지내려면 각자가 품고 있는 향수(鄕愁)를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일본은 총칼이 빛나던 ‘일본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버리고, 한국은 사과하라고 하면 사과하던 ‘과거의 일본’에 대한 향수를 버리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영광을 극히 정상적인 오늘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은 50년 전 일본을 전제로 한 관계 회복은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은 예전의 그런 허약한 나라도 아니다. 일본의 종속변수를 자처할 이유가 없다. 한일 수교 50년, 행사로 기념하느냐 대담하게 틀을 바꿔 기념하느냐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선택이다.

심규선 대기자
#한일#수교#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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