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한국 외교, 차∼암 고달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6일 03시 00분


지난 열흘간 강대국 파워 충돌… 미일은 히로시마서 팔짱 끼고
중국은 북한 손 다시 잡고 반격… 대통령 아프리카-프랑스 방패는
미중의 창을 막기엔 역부족… 궁수도 과녁도 움직이는 외교판
역량은 커졌지만 어려움도 늘어… 자화자찬은 경계하되
국론 모아주는 게 그나마 배려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강대국의 조건을 꼭 하나만 들라면? 예전에는 답이 궁했으나 요즘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나라 눈치 보지 않고 외교를 할 수 있는 나라라고. 1990년대 조지프 나이가 개념화해 유명해진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에도 외교력이 어디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강압 외교는 하드파워지만, 공공 외교는 소프트파워라는 식이다.

맞다. 외교력은 회색지대에 있다. 그래서 더 효율적이다. 강대국이라도 요즘엔 하드파워인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을 마구 휘두를 수는 없다. 갑 속에 든 칼이다. 문화와 감성, 가치에 주목한 소프트파워는 디자인은 참신한데 효용은 검증 안 된 신상이다. 아직 갑 속에 못 들어간 칼이다. 외교력은? 갑 속에서 반쯤 뽑은 칼이다. 겁을 더 주고 싶으면 더 뺄 수도 있고, 눈총이 심해지면 슬그머니 집어넣을 수도 있다. 아주 편리한 무기다. 그래서 요즘 강대국이 자주 쓴다.

최근 열흘 동안 세 갈래의 외교 뉴스가 신문의 1면 머리기사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신문 지면이 파워 게임의 축소판이었다. 세 갈래란 미국과 일본, 중국과 북한, 대통령과 아프리카·프랑스가 발신한 뉴스를 뜻한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해 ‘핵 없는 세상’을 호소했다. 그러나 원폭 투하를 사실상 사과하고, 미일이 찰떡궁합을 과시한 게 더 큰 뉴스였다. 우리는 씁쓸했다. 미일 접근을 중국 포위로 해석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갑자기 북한의 이수용을 불러들여 유엔 제재 때문에 곤경에 빠진 북한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북한은 중국 뒤에 숨어 한숨을 돌렸다. 우리는 실망했다. 미국은 다시 중국의 금융기관과 최대 통신장비회사 화웨이(華爲)의 목을 조였고, 사드 배치도 재론했다. 우리는 당황했다. 대통령은 아프리카와 프랑스에서 환대를 받으며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했다. 우리는 감동했다.

대통령에게는 미안하지만, 감동은 짧을 것이고 씁쓸함과 실망과 당황은 오래갈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뺀 칼에 번쩍하고 스치는 섬광은 우리의 국익을 노린다. 미국의 강공은 한중 간의 경제와 안보 접근을 막고, 한일 간의 역사 반목을 끝내라고 강박한다. 중국의 반격은 한국의 대북 정책과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가져올 게 분명하다. 한국과 사활적 이익을 공유하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북한이 모두 우리에게 난제를 던지고, 답을 재촉한다. 이들이 행동하기 전에 한국의 입장을 배려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3중의 패러독스가 한반도를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글로벌 패권경쟁을 하면서도 다방면에서 협력해야 하는 미중 패러독스, 경제 분야의 의존도는 높아지는데 정치와 안보 분야는 협력 수준이 낮은 아시아 패러독스, 동맹을 강화해 북한을 압박해야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한반도 패러독스다. 이런 압박은 한국 외교의 어려움과 코스트를 높인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변화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자는 패러독스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민주주의와 다양성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념 지역 세대 빈부 차이가 몰고 온 고질병, 남남 패러독스다. 외교에선 이게 더 문제다.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협상 대상국을 무시한다(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착각한다). 제시하는 목표가 매우 높다(선명성 경쟁의 산물이다). 성과를 얻어도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진영 논리 때문이다).

역대 정권 모두 국내 문제나 경제가 잘 안 풀리면 외교에서 점수를 따려고 했다. 이 정권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더 심하다. 외교 분야에서 자화자찬이 많이 나온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달라진 외교 환경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냉전 시대의 외교는 편했다. 진영의 우두머리만 잘 따라가면 중간은 갔다. 그런데 지금은 우방과 적을 구분하기 힘든 데다 모든 국가가 각개약진을 한다. 과녁도 움직이는 시대다. 한국은 남남 패러독스 때문에 외교 목표와 수준을 설정하기가 힘들다. 궁수까지 움직이는 시대다. 과녁과 궁수가 모두 움직이니 명중 확률은 그만큼 떨어진다. 그런데도 국민과 정치권은 외교의 판은 냉전 시대로 상정하고, 국력은 실제 이상 커진 것으로 착각하며 성과를 내라고 강요한다.

외교력도 정권마다 차이가 있다.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마냥 이해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강대국 눈치는 보더라도 국내 눈치는 안 보게 해주는 것, 그게 외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그러고 나서 책임을 묻는 게 순리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외교#파워 게임#미국#중국#패권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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