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검찰이 대통령을 실망시켜야 나라가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4일 03시 00분


최순실 씨 의혹에 대한 대통령과 일반 인식에 큰 괴리
그동안 민정수석실은 직무유기… 이제 진실규명할 데는 검찰뿐
대통령의 예상을 많이 깰수록 나라의 체면도 살고 검찰의 위신도 선다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궁금하다. 최순실 씨의 행적에 대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그동안 어떤 보고를 받고,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 최 씨는 친인척이 아니라서 관찰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말길 바란다. 또 하나. 대통령은 동생들도 청와대 출입을 시키지 않을 정도로 엄격하게 주변 관리를 하고 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다.

 두 말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민정수석실이 최 씨를 주시하지 않을 이유도, 그렇다고 최 씨가 청와대에 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되지 못한다. 정권 초기부터 최 씨를 원칙대로 다뤘더라면 대통령이 지금처럼 곤경에 빠질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원칙대로’란 비위 사실을 알게 되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경고를 하거나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다. 왜? 최 씨는 40년 간 대통령과 친한 인물이므로(40년간 알고 지내왔으나 절친은 아니었다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

 최 씨는 일찌감치 적색 신호였다.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13년 하반기에 대한승마협회를 감사하고 문화체육관광부 간부들을 경질할 때 대통령의 결심에 영향을 준 것이 최 씨 부부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다음 해 12월엔 민정수석실 행정관 박관천 경정이 정윤회 씨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되며 “우리나라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이라는 해괴한 말로 관심을 끌었다(그의 ‘선견’이 요즘 화제다). 청와대 간부들이 최 씨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면, 무능보다 더 나쁜 거짓말이다. 

 그런데도 민정수석의 책임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는 것은 의문이다. 추정은 하나다. 최 씨 건은, 몰라도 되거나 알아도 모른 척하고 있으면 된다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런 판단에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스스로 손발 묶고, 입까지 막아 번견(番犬)이 아니라 충견(忠犬)에 만족한 민정수석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지난주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하는 말을 들으며 내 판단을 회의했다. 대통령 생각이 저 정도라면 민정수석이라고 무슨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은 자유지만 표현은 자유가 아니다. 표현을 하면 생각의 편린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보여준 생각의 편린을 종합해보면, 최 씨 의혹의 심각성은 인식하고 있으되 방향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과 운영 과정에 별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여론, 언론, 야권 등과의 괴리가 크다. 

 그렇지만 검찰은 대통령의 길고 자세한 해명은 다 잊어버리고 ‘어느 누구라도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는 단 한 줄만을 지렛대 삼아 수사에 매진하길 희망한다. 그동안 대통령의 아들들과 형님들이 설치는 것도 부끄러웠는데, 핏줄도 아니고 직책도 없는 인물까지 ‘갑질’하는 것은 국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이번 사건은 규명하지 않으면 아주 오래갈 것이다. 오래갈수록 대통령의 집권 말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대통령이 이 사건의 사실 규명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인 함의도 고민해야 할 이유다. 대통령이 최 씨에게 수사에 협조하라고 하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결국 찻잔 속의 태풍인지 ‘최순실 게이트’인지를 가릴 주체는 검찰밖에 없다. 다만 공적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집안 일로 검찰의 수사까지 받고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같은 검찰로부터 최 씨의 수사 과정을 보고받는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블랙코미디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대통령이 설명한 정도라면 그것대로 발표하면 된다. 그러나 대통령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면, 검찰은 대통령을 많이 실망시켜 주길 바란다. 그래야 나라의 체면도 살고, 검찰의 위신도 선다.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나는 정유라 씨의 앞날이 걱정이다. 18세 2개월짜리 예비 대학생이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했다는 말에 무척 놀랐다. 본인의 얄팍한 선민의식도 문제지만 부모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라 씨는 ‘부모 덕에’ 20년은 금수저로 살았지만, ‘부모 탓에’ 그보다 세 배쯤 긴 60년은 ‘흑수저(黑수저)’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가 실력이라고 숭배했던 돈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테니 흙수저로야 살지 않겠지만, 가슴을 펴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야 한다면 흑수저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사건이 더 비극적인 것은 권세와 이권, 오만과 허세의 몰락 뒤에 가정의 붕괴와 젊은이의 좌절이 겹치기 때문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정유라#최순실#박근혜#대한승마협회#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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