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합의에 쏟아지는 비판에 언론은 시시비비 가려 주고…
다른 시각도 전달할 의무 있어
한국 언론은 각종 성역 깨며 성장… 마지막 남은 영역이 ‘국민 정서’ 영향 큰 일본 보도
언론은 ‘감정적 선수’가 아니라 ‘냉정한 심판’이라는 생각 가져야 ‘70년 갈등 쳇바퀴’ 깰 수 있을 것
박근혜 정부의 대일정책 기조는 정권 초기에는 해빙무드를 보이다가 정권 말기에 원점으로 돌아가는 롤러코스터에서 탈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권 출범 초부터 최대 난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의 전제로 내세우는 역순(逆順)의 카드를 뽑아들었고, 3년 가까이를 버텼다. 그 출구가 2015년 12월 28일 합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정부도 예전 패턴을 깨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위안부 합의가 저항을 받고 있는 데다 양국 갈등이 도졌기 때문이다.
기자는 한일 정부의 합의로 만든 ‘화해·치유재단’의 이사임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지난해 7월 이사가 된 후 ‘내가 욕먹는 위안부재단 이사가 된 이유’라는 글(2016년 8월 1일자)을 통해 ‘불가능한 최선’보다는 ‘가능한 차선’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기자 개인의 소신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한일 관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언론인데, 최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 태도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한국 언론은 광복 이후 숱한 성역을 깨면서 성장해 왔다. 지금은 어떤 권력기관, 어떤 직역, 어떤 국가를 비판하는 데도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성역’이 있다. 일본 관련 보도다. 일본 관련 보도에서 언론은 여전히 국민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반일(反日), 극일(克日)을 넘어 용일(用日)과 협일(協日)을 말하던 언론이 요즘 너무 쉽게 반일로 회귀하는 것 같다.
이런 주장을 하면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의 잘못된 주장,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부족했던 점에 대한 비판 등에는 기자도 동의한다. 국민 정서도 존중한다. 기자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보도한 것들이 아니라 보도하지 않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일본 관련 보도에서도 언론은 ‘감정적인 선수’가 아니라 ‘냉정한 심판’이 돼야 국내외적으로 신뢰를 얻고, 궁극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어떤가. 위안부 합의 당시 생존 위안부 할머니는 46명이었다. 그중 34명이 ‘화해·치유재단’이 배상금 성격으로 지급하는 1억 원을 받겠다고 신청했고, 이 중 31명은 두 번에 나눠 이미 전액을 지급받았다. 예상보다 많은 숫자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보도자료는 푸대접을 받았다. 국민 정서에 맞지 않아 쓰기 싫다는 기자도 있었다. 합의를 거부하는 할머니들이나 단체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고민 끝에 다른 결정을 내린 할머니들의 선택도 존중받아 마땅한 것 아닌가.
10억 엔에 소녀상을 팔아먹었다는 주장도 그렇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죄 표시로서 단돈 1엔이라도 ‘일본의 예산’을 받길 원했고, 그 결과가 10억 엔일 뿐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본말을 전도해 10억 엔과 소녀상 철거를 연계한다면 일본 정부를 비판해야지, 한국 정부를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위안부 소녀상은 다른 곳이라면 어디라도 괜찮지만 다른 나라의 공관 앞에 세우는 것은 국제협약상 문제라는 점도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것은 정부끼리의 약속일 뿐 민간단체까지 구속할 근거는 없다는 것도 알려야 한다. 유력 대선 주자들이 위안부 합의를 폐기한다면 무슨 방법으로 그 이상의 성과를 얻어낼 것인지도 물어봐야 마땅하다. 최근 사설이나 칼럼 등은 이런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나 사실을 충실히 전해야 하는 보도는 오히려 소극적이다.
일각에서 위안부 합의를 굴욕적 외교 참사라고 한다. 중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을 철회하라며 바로 지금, 안보 문제에 대해, 내정간섭까지 해가며, 한국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 조공 받던 시절에 군림하던 행태다. 그런데도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 사드 모형을 세워 항의하자는 주장도, 단체도 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한일 문제를 보도하는 우리 언론이 ‘양비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며, 일본의 태도를 더욱 질책해야 한다는 지인도 있다. 국민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언론이 양비론까지 오게 된 것도 진전이라면 진전이라는 게 기자의 평소 생각이다. 30년 전에는 시도조차 못 했던 일이다. 한국은 이제 일본의 종속변수가 아니다. 일본의 변화에만 목을 맬 이유도 없다. 일본만을 질책하며 국내 평가에 만족했던 보도 방식은 광복 이후 한국 언론이 70년간 걸어온 편한 길이다. 편한 보도로는 한일 관계를 바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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