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관중, 정치인은 프로선수… 시민 함성 속에 뛰는 게 선수다
대통령에게 책임 묻고 새 총리 정해 국정 맡기는 정치권 의무 외면한 프로들
차라리 정치영역 대폭 줄여… 시민·공동체가 춤추게 하라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누군가가 물었다. 촛불정국을 어떻게 보았느냐고. 이렇게 대답했다. 촛불에서는 희망을, 정치권에서는 절망을 보았다고.
먼저 촛불에서 본 희망 이야기를 해 보자. 오랜 세월 우리는 국가권력에 의해 다스려져 왔다. 시민은 그저 피치자에 피보호자였다. 이를테면 잘못된 물건을 사 피해를 입어도 소비자는 집단소송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국가가 구제해 주어야 집단적 피해보상을 받는다. 대학 운영의 큰 틀도 학생과 교수가 아니라 정부가 짜고 있다.
국가가 이 모든 것을 잘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다. 민주화 과정에서 이미 그 힘을 잃은 데다 정보력과 자원동원력 또한 예전 같지 않다. 결국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무딘 칼을 들고, 목소리 크고 힘 있는 쪽의 눈치나 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 시대착오적인 구조가 바뀌는 꿈을 꾸어 왔다. 국가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의 자율적 의지와 공동체 정신에 의해 움직여지는 나라, 그래서 시민의 대리인인 대통령 국회의원 관료가 국가권력 위에 올라탈 일도 없고, 또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주인 행세를 할 일도 없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었다. 공적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낮은 관심에 실망하고 낮은 참여열기에 좌절하곤 했다. 공격적 진영논리와 인신모욕성 언어들로 점철된 댓글들을 볼 때면 과연 이들이 이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을까 묻곤 했다.
그러다 이번의 촛불을 보았다. 또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촛불을 이끈 집행부나 만장을 앞세우며 조직적으로 참여한 단체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냥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나선 시민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촛불의 이런 모습과 달리 정치권의 모습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가 왜 존재하며, 정치인의 역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야구경기로 치면 시민은 관중이고 정치인들은 프로선수이거나 감독이다. 관중은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싫어하면 싫어하는 대로 소리만 질러도 된다. 공을 잘 치거나 경기를 잘 운영해야 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프로는 다르다. 공을 잘 쳐야 하고 경기 운영도 잘해야 한다.
촛불정국에 있어 프로로서의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야건 탄핵이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일, 새 총리를 정해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챙기게 하는 일, 그리고 개헌 등을 통해 다시는 이번과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 등이었다.
모두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촛불민심의 꽁무니에 붙어 책임을 묻는 일에만 매달렸다. 경제 사회 안보 등 국정의 모든 분야가 위중한 시기에 새 총리를 정해서 국정을 챙기게 하는 일까지 내팽개쳤다. 특히 이 모든 것을 주도한 제1야당은 탄핵소추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까지 반대하고 있다. 스스로 책임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일을 하게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관중보다 더 낮은 수준에서 내려오라 고함만 지르는 이들 프로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관중 수준에 머물겠다면 차라리 경기장 밖으로 나오기라도 하지. 그래야 대신 들어갈 다른 선수들에 대한 기대라도 할 것 아닌가.
흔히들 정치개혁으로 이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지역구도와 진영논리가 강한 상황에서 정치는 어쩔 수 없이 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치의 영역과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옳다. 어떻게 하느냐고? 정치는 국가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 국가권력이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는 부분을 줄이면 정치가 개입할 공간도 그만큼 줄게 된다. 오랫동안 국가 우위의 구도를 유지해 온 나라이다.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어디 한둘이겠나? 과도한 부분을 줄이고, 그 자리에 시민사회의 자율적 정신과 공동체 정신이 살아나게 하면 된다.
곧 있을 개헌 논의에는 이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한다. 즉, 국가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 내지는 공동체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또 분권적 구도의 강화 등 시민사회의 역량과 역할을 키우기 위한 논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때로 절망적이기까지 한 정치가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많은 부분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시민사회가 이를 대체하게 해야 한다. 수백만 촛불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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