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53>‘이 세상 집이 아닌 집’ 옥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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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3일 03시 00분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동춘당 송준길은 당파가 뚜렷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 예학을 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영남 예학의 거유인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었다. 사위가 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장인으로부터 퇴계의 사상을 공부했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정통을 한 몸에 갖고 있었던 셈이다. 친구인 우암 송시열이 한사코 기호 예학의 칼날로 시대를 재단하려 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나 우암을 사계문하에서 공부하도록 이끈 사람도 동춘당이다. 어떻게 이런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대방무우(大方無隅),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듯이 동춘당은 그릇이 큰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초연물외(超然物外).’ 별당인 동춘당이 있는 곳에서 계족산성 쪽으로 길을 잡아 계류를 따라 가면 바위에 쓴 동춘당의 글씨가 나타난다. 획이 정확하면서도 활달하다. 세속의 바깥에 있고,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그 글씨에서 눈을 돌리면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옥류각(玉溜閣)이 바라다 보인다. 물이 흐르는 가파른 계곡을 디디고 호쾌하게 서 있다.

문득 우암의 남간정사가 생각났다. 제월당 송규렴이 1672년 세상을 떠난 동춘당을 기념하여 옥류각을 세운 것이 1693년, 우암이 남간정사를 지은 것이 1683년이니까 남간정사가 세워진 지 꼭 10년 만에 지은 것이다. 선배인 우암이 조심스럽게 작은 계류에 남간정사를 올려놓았다면, 후학들이 지은 정자답게 옥류각은 거침없이 물이 요동치는 계곡을 타고 앉아 있다. 남간정사가 정적이라면 옥류각은 동적이며, 집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태도도 거침없고 자유스럽다.

지금 옥류각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모두 여섯 칸으로 계곡의 하류 쪽에서 왼편으로 ‘田’자로 네 칸의 마루를, 오른편으로 두 칸의 방을 들이고 있지만, 원래는 방이 없이 다 마루로 짜인 정자다. 시원스러운 계류의 흐름을 타고 앉아 온 천지사방을 향해 툭 터져 있어 계족산의 자연을 이 마루에서 감상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옥류각은 녹음이 지면 녹음으로, 단풍이 지면 단풍으로, 눈이 내리면 눈에 묻혀 물외(物外)를 이루어, 이 세상에 있는 집이 아닌 집이 되었을 것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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