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이란 명칭은 당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집현전서원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의 서원건축에서 보이는 장서고는 서원의 이러한 원래 기능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그 후 송나라 때부터 선현을 받들고 어울려 공부하던 본격적인 서원이 나타난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의 서원이 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한 반면,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근거지인 동시에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기관이기보다는(나중에 변질되기는 했지만) 순수하게 학문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기 위한 시설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왜냐하면 일단 서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진사나 생원시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이와 같은 서원이 생긴 것은 세종 때부터다. 전라도 김제의 정곤, 광주의 최보민, 평안도의 강우량 등이 서원을 세워서 강학한 기록이 있다.
서원은 후학교육과 선현봉사(先賢奉祀)의 두 기능이 가장 중요시 된다. 백운동서원 이전의 서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백운동서원 이후의 서원들에서는 그 두 가지 기능이 예외 없이 지켜진다. 그렇다 해도 남는 하나의 의문이 서원건축의 누마루다. 서원건축에 누마루가 언제 도입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는 없다. 도동서원에는 원래 누마루가 없었으나, 이층 누각인 수월루가 들어선 것은 1855년이다.
대구 달성군 도동리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고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가 주축이 돼 1605년에 건축되었다. 한강은 김굉필의 외증손이다. 덕계 오건에게 배우고 이어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에게서 배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배웠다기보다는 만나서 깊은 얘기를 나눈 정도인 것이 사실에 가깝다. 도동서원 이야기를 하며 한강의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도동서원 자체가 바로 한강이기 때문이다.
경관을 택해 북향하고 있는 거침없는 좌향, 환주문(喚主門·주인을 부르는 문)에서 사당까지 정확히 일직선상의 축으로 꿰고 있는 엄정함, 장식을 잘 하지 않는 서원에 기단이나 계단에 은밀한 장식을 해 둔 재기, 제문을 태울 곳까지 마련한 치밀함 등은 한강 정구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정신을 양쪽 모두 드러내는 것으로 구현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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