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각 지역 사림들의 본거지였던 만큼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처음에는 강학이 주된 기능이었지만 점차 문서를 보관하고 책을 편찬하는 기능이 추가되면서 비슷한 시기에 선현을 배향하고 제향하는 기능까지 추가되었다. 그러다 강학 기능이 점점 작아지고 선현에 대한 제향 기능이 강화되면서 집회의 성격이 강해졌다.
서원건축의 누마루는 이즈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재사건축이 가문 간의 결속을 위한 콘퍼런스 홀이었다면, 서원건축은 후기로 갈수록 학파의 정치적 결속을 위한 콘퍼런스 홀로 변해갔다.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서원건축이 갖고 있는 기능 가운데에서도 서책을 보관하고 편찬하는 기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1572년 건립했는데, 다음 해인 1573년 경주부에서 ‘삼국사기’를 옥산서원에 수장하게 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옥산서원 경각에 있는 서책 일부가 홍문관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삼국사기’는 홍문관으로 보내지 않고 옥산서원 근처의 독락당 어서각의 서책과 함께 도덕암에 일시 보관되었다. 그러다 난리가 끝난 후 다시 독락당 어서각에 보관되어,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유실되지 않고 전해지다가 1972년 옥산서원에 수장고인 청분각(淸芬閣)이 세워지자 독락당 어서각에 있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과 함께 청분각으로 이관되었다. 실로 유구한 세월 동안 책을 보관하는 임무를 충실히 한 것이다.
많은 서원이 그렇듯이 옥산서원의 현액들을 입구에서부터 찬찬히 차례로 살펴보면 흡사 거대한 책의 세계에 한발 한발 내딛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책의 이름은 물론 ‘논어’나 ‘중용’ 같은 경전이다.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은 논어의 첫 구절인 학문하는 즐거움을 말한 것이고, 한석봉의 글씨로, 묵직하게 들어가는 사람을 압도하는 누각의 무변루(無邊樓)는 시작도 끝도 없는 태허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중용’의 요체이기도 하고 ‘주역’에 기대자면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배우는 학생들을 어르고 때리는 매로써 그만한 게 없을 것 같다. 이 이층 무변루에는 특이하게도 온돌방이 설치되었다. 일층을 메워 적당한 높이에 고래를 들이고 이층 온돌방을 데우게 했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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