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불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일 03시 00분


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너는 멋있게 살아.”

약간의 부축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스스로 걸어서 응급실에 들어가셨다. 그 뒤로 숨을 거두기까지 1년 8개월 동안 다시는 스스로 걷지 못하셨다. 자존심 하나로 모든 것을 버텨내며 살아온 분이 몸 어디 한 부분조차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이 누워만 지냈다. 고통을 감히 헤아릴 길 없다.

볕 좋은 늦여름 저녁이었다. 집에 들어가겠다며 인사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가 온힘을 턱에 모아 말했다. 너는 멋있게 살아.

고등학교 때 논어를 읽다가 생각했다. 40이라는, 상상 못할 그런 나이를 먹으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한, 멋있는 사람이 되는 거구나. 지난달 꽉 채워 마흔 해만큼의 아침을 맞았다. 소소한 자극에 전만큼 일일이 요동치지 않게 된 건 요행 맞다. 하지만 정신적 성숙은 어림없이 멀다. 그저 몸의 기운이 떨어진 덕이다.

아버지의 당부가 남들 앞에서 멋있는 척 떵떵거리며 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을 거다. 외형의 자아에 붙은 꼬리표는 그나마도 어림없다. 이혼 10년차 40세 독거 남성. 청소기를 돌리다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본 TV 토크쇼에서 정장을 멋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서로 맞장구치며 말했다. “남자는 혼자서 오래 생활하기 힘들어요. 수명도 짧아져요.”

하루 먼저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은 대학 같은 과 친구가 그 한 주 전 결혼했다. 축가를 불렀다. 게으름 피우느라 연습은 주말 장 보러 움직이는 운전석에서만 했다. 녹음을 들어보니 목에서도 기운이 떨어졌는지 호흡이 한없이 가쁘다. 민망하게 음정만 맞춰냈다.

변명을 하자면 사실 노래 가사에 큰 공감이 없었다. 다른 한쪽을 ‘누군가 주신 단 하나의 감지덕지 선물’로 여긴 어느 한쪽의 무한한 사랑과 헌신 다짐이라니. 그런 관계는 금세 기운이 떨어진다. 식장에서 마이크를 잡고서는 차마 하지 못한 얘기를 신혼여행 잘 왔다며 안부문자 건넨 친구에게 답신으로 전했다.

“요령껏 많이 다투고, 잘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

불혹(不惑)의 심성은 까마득하다. 그건 성현의 경험담일 뿐이다. 벌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에 대한 글을, 갖고 있는 모든 걸 날마다 탈탈 털어내듯 겨우겨우 써내며 살아간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큰소리치며 시작한 일이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바뀌어야 마땅해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해 끊임없이 써야 한다고 믿는다. 바꿀 수 있든 없든 상관없다. 세상에 아무 바꿀 것 없다는 듯 시침 떼고 앉은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주어진 몫이라 믿는다.

누구나 불현듯, 어느 날 예고 없이,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무엇에든 흔들릴 까닭이 없다. 멋있게 살라는 당부는, 멋있어 보이려 애쓰지 말라는, 흔들림을 두려워 말라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는,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감사하며 집중하라는 의미였으리라고, 믿는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마흔#아버지#불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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