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당 대표가 됐을 때 그는 51세였다. 정계에 입문한 지 꼭 8년 된 재선 의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8년간 그의 행보는 파란을 일으켰다. 2000년 12월, 권부의 핵심으로 불리던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당시 최고위원의 2선 후퇴를 주장했다. 김대중(DJ)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였다. 2001년에는 여당의 쇄신을 요구하는 당내 정풍(整風)운동을 주도했다. 1970년대 김영삼(YS), DJ의 ‘40대 기수론’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어 완주했다. 승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차기 주자의 위상을 굳혔다. 2002년 대선이 끝나자 신기남 천정배 의원과 신당 운동의 물꼬를 텄다. 그는 열린우리당 창당의 기획자였다. 그리고 당을 대표하는 주역이 됐다.
그는 정동영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다. 51세가 될 때까지 그는 거칠 것 없이 질주했다. 대중적인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떠나지 않았다.
물론 비판도 받았다. 권 전 최고위원은 그의 정치를 ‘하극상 정치’라고 일축했다. 혹자는 “정치인 정동영의 스타덤은 권노갑과 노무현의 ‘묘비’ 위에 세워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몸값이 오르자 매니저를 갈아 치우는 스타를 연상시킨다”라고 꼬집었다. “방송 앵커 출신이라는 꼬리표 탓인지 내용이 빈약한 이벤트 정치에만 능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뭔가를 했다. 그의 문제 제기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평가도 들었다.
51세의 정 전 고문을 끄집어낸 이유는 새정치연합의 비슷한 51세 재선 의원이 떠올라서다. 지난해 그는 세대교체론을 앞세우며 당 대표를 노렸다. 하지만 3위에 머물렀다. 정 전 고문이 첫 최고위원을 지냈을 때(47세)와 비슷한 나이(46세)에 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정 전 고문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느덧 그는 당 안팎에서 ‘기득권’으로 불린다. 30대 당원으로부터는 “지역구를 떠나 고향으로 하방(下放)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당 여기저기서 내년 총선 불출마 대상으로 꼽히기도 한다. 최고위원 한 번 했을 뿐 당권을 쥔 적도 없는 그로서는 억울할 만한 일이다.
그는 이인영 의원이다. 이른바 정치권 386(30대·1980년대 학번·60년대생)세대의 상징이다. 386으로 국회에 들어와 이제 ‘586’이 됐다. 이 의원은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적자(嫡子)다. 김 전 고문은 어쩌면 그의 삶의 멘토다. 그에게 김 전 고문을 밟고 일어서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386 정치인에게 따라 붙는 ‘기생(寄生) 정치’라는 딱지가 온전히 그의 탓일 수도 없다. 새정치연합 지리멸렬함의 책임을 그에게 따져 묻는 것 또한 부당하다.
그럼에도 “51세 정치인 이인영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