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농축수산물을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한국농축산연합회와 한국화훼단체협의회, 과수협회 등은 4일 정부세종청사 인근에서 김영란법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 내년 9월 이 법이 시행되면 일정 금액 이상의 농축수산물을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 어려워져 매출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민심이 들끓자 총선을 앞둔 농어촌 의원들이 호응하고 나섰다. 새누리당 김종태 의원 등 20명은 지난달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농축수산물과 가공품은 제외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10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김승남 의원은 ”농축수산물은 명절 선물용으로 활용되고 있는 게 현실인데 김영란법 대상에 포함된다면 농어촌에 미칠 충격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최근 “법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으로 다듬을 수 있다”며 법 개정 가능성을 열어뒀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김영란법의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없도록 정교하게 설계하고 충분히 숙고했어야 했다.
올 1월 국회 정무위 법안소위에서 여야가 합의한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에 민간인이 대거 포함되면서 위헌 논란이 일었다.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당시 여야 지도부를 포함해 많은 의원들이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회는 별 수정 없이 3월 3일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이후 사석에서 만난 의원들은 “개혁 입법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가 부담스러워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다. 이렇다 보니 당시 찬성표를 던졌던 의원 중 15명은 불과 5개월여 뒤 법 개정안에 발의자로 이름을 올리는 상황이 됐다.
입법은 국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자 의무이다. 그래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의원이 모든 법안을 꿰뚫고 있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사회적·정치적으로 쟁점이 되고, 수백만 명에게 적용되는 법안만이라도 내용을 숙지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의원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자질이다.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내년 4월 총선이 실시된 뒤 20대 국회가 개원하기 전에 법을 고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하지만 19대 국회 막바지에 법을 개정할 의지와 동력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국회가 만든 법을 시행하기도 전에 국회 스스로 고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잘못된 법을 고쳐야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수정하는 게 그나마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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