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영상의학과 전문의로 일하는 동창과 고교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났다. 술잔이 한두 순배 돌 때까지만 해도 반가운 대화가 오갔지만 이내 어두운 분위기가 됐다. 친구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1월 의료소송을 당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다.
친구가 담당했던 환자는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하기 전 조영제를 복용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환자가 평소 복용하던 당뇨병 약이 병원이 사용하는 조영제와 부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친구는 의대 시절부터 조영제 부작용에 대해 단편적 지식만 배웠지, 특정 약이 조영제와 함께 먹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나처럼 많은 의사들이 이런 부작용 사례를 알지 못할 것이다”며 “다른 의사들과 사례를 공유해 추가 사고를 막고 싶은데, 쉬쉬 하는 분위기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입원 환자 10명 중 한 명은 의료인의 과실을 경험할 정도로 의료사고가 늘고 있다. 현대 의학이 전문화되면서, 자신의 전공을 제외한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의사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와 의료계는 사고 사례를 수집해 유형화하고 많은 의사들과 공유하는 등 의료사고를 예방하는 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사고에 대해 쉬쉬 하는 분위기 탓이다. 대부분의 병원은 이미지에 타격받을 것을 우려해 의료사고 사례의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 의료인들이 다른 병원에서 발생한 사고 사례에 대해 인지하고, 예방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보건복지부는 각 병원에 흩어진 의료사고 사례를 직접 수집해 예방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에 의료사고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병원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정부에 보고하는 E-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사례를 축적하고 예방법을 개발해 전국 의대, 병원과 적극적인 공유가 가능해진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다행스러운 조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행법 체계 안에서는 시스템이 제 역할을 못할 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제정된 환자안전법은 ‘병원은 환자 안전에 위해가 가는 상황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 안전에 위해가 가는 상황’에 ‘의료사고’를 명시하지 않아 보고 대상이 불명확하다. 이뿐만 아니라 보고가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이라 병원이 의료사고를 숨겨도 처벌할 근거가 없다. 복지부는 시행령을 개정해 이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의료계 반발을 뚫을 수 있을지 불투명해 보인다.
신해철 씨의 사망 이후 ‘의료사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 관심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의료사고를 당해도 제대로 호소할 곳조차 마땅치 않은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에 희망을 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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