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20년 전 11월 11일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창립했다.
노동운동 ‘아버지’의 마흔 다섯 번째 추모식과 ‘아들’의 스무 번째 생일잔치가 동시에 열린 지난주. 민주노총은 ‘민중총궐기’로 일어나 광화문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검거망을 피해 조계사로 피신했다.
‘성인’이 된 민주노총은 여기서 멈추지 않겠다고 한다. ‘노동개악(改惡)’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확인한 만큼 투쟁을 더 확대하겠다는 것. 더욱더 가열한 투쟁으로 시민과 노동자의 분노를 조직하고, 이를 대변해 맞서 싸우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모처럼 민주노총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지난해 9월부터 이어진 노동개혁 논의에서 민주노총은 철저히 소외됐다. 노사정(勞使政) 협상에 불참하고, 두 차례 총파업까지 했지만 현장 반응은 차가웠다.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는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거셌다. 노동계에서조차 “민주노총은 도대체 뭐하는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택한 길은 노사정 협상이나 노동개혁 입법 논의가 아니라 ‘닥치고 투쟁’이었다. 존재감을 과시하기엔 충분했다. 최근 몇 년간 민주노총이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역대 첫 조합원 직접선거로 당선된 한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렇게 관심을 받은 것도 처음이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여공들의 열악한 처우에 처음으로 눈뜬 것은 1965년, 분신을 한 것은 1970년이다. 5년 동안 노동법을 공부하고, 노동청에 진정을 넣고, 신문사에 제보를 넣거나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켰다.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태일은 ‘바보’라고 불렸다. 1969년 6월 처음 만든 노동운동 조직 역시 ‘바보회’였다.
전태일은 시위를 하지 않았고 할 줄도 몰랐다. 정부에 요청하고, 언론사에 제보하는 것이 유일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마저 전달이 되지 않자 1970년 10월 24일 처음으로 거리 시위를 기획했다. 물론 그것도 경찰의 방해로 무산됐고 20일 뒤 결국 몸에 불을 붙였다. 그가 성공한 처음이자 마지막 시위였다. 민주노총은 조직도 있고 자금도 있다. 총파업으로 한국 경제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노사정 협상과 입법 논의에도 참여할 수 있고 정부와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을 할 수도 있다. 전태일처럼 ‘바보’ 같은 투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전자와 후자를 과학적으로 병행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전자만 하고 후자는 하지 않는다. 투쟁만 있고, 교섭은 없다.
9월 열린 20주년 토론회에서 노동계 원로와 전·현직 간부들은 “투쟁만 고집하지 말고 교섭도 병행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대중은 지금, 다시 한번 ‘바보’를 원한다. 조직논리와 진영논리가 아닌 진짜 노동자를 위한 투쟁. 실리를 극대화하는 치밀한 교섭. 전태일은 그걸 알았고, 민주노총은 그걸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과 민주노총, 누가 진짜 바보인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