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끔찍한 사고가 났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아들은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응급실 의사는 소년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의사는 “난 얘를 수술할 수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고 소리쳤다.
이걸 읽고 고개를 갸웃한다면 ‘의사=남자’로 여기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아이 아버지는 이미 죽었는데 (아마도 남성인) 의사도 아이 부모라면 대체 누가 아버지인거야?’라고 착각하는 것. 하지만 이 의사는 여성이고 아이 엄마다. 이는 직업과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보여주기 위해 젠더 연구에서 많이 거론되는 일화다.
나 역시 공감한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나는 ‘기자’보다 ‘여기자’로 통칭될 때가 적지 않다. 남자 동료는 남기자로 불리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여교사, 여의사, 여교수라는 단어는 여전히 익숙하지만 남교사, 남의사, 남교수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은 길러지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색상에 대한 인식이 단적인 예다. 네 살짜리 남자 조카에게 옷을 사주려 했다가 난감한 적이 있다. 얼굴이 더 화사해 보이라고 분홍 옷을 사주고 싶었다. 여성적인 감수성을 조금 길러주고 싶은 욕심도 살짝 있었다. 하지만 남자아이 옷은 역시나 파랑 계열 일색이었다. 분홍 옷은 여자아이 옷 코너에나 있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많이 접하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로보카폴리, 터닝메카드, 타요 등의 남자 주인공은 죄다 파랑색이 들어간 옷을 입고 나온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바뀔 조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색채 전문기업인 ‘팬톤’은 시대상을 반영해 이듬해 유행할 색상을 미리 발표하는데, 2016년의 색으로 분홍색(로즈쿼츠·13-150-TCX)과 하늘색(세레니티·14-3919-TCX)이 섞인 조합을 선정했다. 팬톤이 두 색상을 택한 건 처음이다. 분홍색은 여성을, 하늘색은 남성을 뜻했지만 최근 성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젠더 블러링·gender-blurring)는 설명이었다.
젠더 블러링이 해외에선 이미 시작됐다. 미국 하버드대 인문학부는 올해 9월부터 ‘제(ze)’라는 새로운 인칭대명사를 사용한다. 학생기록부에 학생이 자신에게 사용됐으면 하는 인칭대명사를 고르는 난이 있는데 그(he)와 그녀(she)뿐 아니라 성별 개념을 배제한 새 단어(ze)를 만든 것. 아이를 대상으로 한 움직임도 달라지고 있다. 완구업체 레고는 올해 여성 고고학자, 생물학자, 우주인 등의 피규어를 내놓아 첫날 다 팔아치웠다. 미국 유통업체 타깃은 장난감·의류 판매대에서 아예 남아용, 여아용이라는 구분을 없앴다.
바라건대 2016년은 서로 다름을 껴안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자신만의 잣대로 남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그래서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길을 가다가 분홍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지나가면 뒤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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