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고딕지구. 좁은 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물결이 연상되는 모습의 지붕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곳의 명물인 산타카테리나 시장이다. 지붕의 외양은 화사한 주황색, 맑은 노란색, 옅은 보라색, 잘 익은 가지색, 싱그러운 연두색 등 형형색색이다. 육각형 타일 32만5000개가 67가지 색깔로 지붕에 붙어 있다. 타일은 지붕 아래 시장 가게들에 진열된 과일 채소 생선을 표현했다. 지붕은 오래된 시장 건물과 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 예술작품 같다. 건축과 디자인 학도들로 항상 북적이고 관광객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1845년 옛 수도원 터에 세워진 산타카테리나 시장은 외곽 도시들에까지 식료품을 공급하는 유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인근 지역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문을 닫을 뻔한 위기가 닥쳤다. 묘안이 필요했다. 상인들과 시청 공무원들은 머리를 맞댔다.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우선 고객과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해 단골을 만드는 지중해 시장을 지향했다. 고객 대부분이 걸어서 10분 이내에 사는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낡은 시설은 백화점보다 더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꾸기로 했다. 유명 건축가 엔릭 미라예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라예스는 물결 모양의 지붕을 1997년부터 8년 걸려 완성했다.
시장 분위기도 바꿨다. 통로를 넓히고 독특한 간판, 친절한 가격 표시, 깔끔한 상품 진열로 고객을 유혹했다. 상생의 방법도 찾았다. 시장에 입주한 슈퍼마켓은 공산품을, 식료품 가게들은 농수산물을 팔았다. 이런 노력으로 절반 이상의 가게들이 최근 10년간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매출을 늘리고 있다.
이 도시에는 산타카테리나 시장 같은 재래시장이 43개가 있고, 이 재래시장들의 발전방안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컨트롤타워는 1991년 시가 설립한 ‘바르셀로나 시장관리원’이다. 공무원, 상인, 정치인이 참여하는 이 기관은 재래시장의 시설물 관리뿐만 아니라 판매 확대, 마케팅, 서비스 수준을 전략적으로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한다. 시장관리원은 매년 600억 원을 투입해 낡은 시장을 관광 명소로 단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최근까지 21개 시장이 리모델링을 마쳤다.
이 덕분에 인구가 160만 명인 이 도시의 43개 재래시장을 해마다 6000만 명 이상이 찾는다. 시민 10명 중 7명은 재래시장에서 장을 본다. 재래시장이 부활하자 지역경제도 살아났다. 재래시장의 연간 경제 창출 효과가 13조 원을 웃돈다.
국내 재래시장도 백화점, 대형 할인매장, 명품매장에 밀려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시설을 개선하고, 상품권을 도입하고, 주차장을 확보하는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하며 재도약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이 매일 장 보고 싶은 시장, 멀리 사는 관광객들도 ‘죽기 전에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은’ 시장이 얼마나 될까. 이 도시 재래시장이 성공적으로 보여준 ‘재생의 힘’을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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