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SDI, 호텔신라 등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다음 달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 공통적으로 상정하는 안건이 있다. 그동안 각 사 대표이사들이 맡아 왔던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도 맡을 수 있도록 하는 정관 변경의 안이다. 정관을 일제히 수정하는 걸 보면 일부 회사는 당장 올해부터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에 오를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사회 의장을 대표이사가 아닌 사외이사가 맡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먼저 이런 변화를 가져온 곳은 포스코다. 포스코는 2006년 정관을 고쳐 아예 사외이사만 이사회 의장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포스코가 내세웠던 정관 변경의 목적은 ‘투명성 강화 및 지배구조 선진화’였다. 포스코에서 이사회 의장을 지낸 한 인사는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포스코 이사회는 사내이사 5명, 사외이사 7명으로 구성돼 있다. 사외이사가 단순히 인원이 더 많다는 것을 넘어 의장 역할까지 하게 되면서 이사회의 견제 기능이 더 커졌다는 게 포스코 측의 설명이었다.
물론 의장을 외부인이 맡는다고 이사회가 회사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다. 기업지배구조 전문가인 박상용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1년에 한 번씩 의장을 교체한다거나 실질적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사외이사가 의장이 돼도 단순한 사회자 역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이사회 의장의 임기를 최소 3년으로 하고 회사의 주요 경영 사항을 의장에게 사전 보고하는 등의 제도들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행보가 재계 안팎에서 큰 주목을 받는 이유가 있다. 이사회 독립 시도는 지난해부터 삼성그룹이 추진해 온 주주친화 정책들과 맞물려 지배구조 선진화의 초기 단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주주친화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난해 10월 통합 삼성물산 이사회 내에 설치한 ‘거버넌스위원회’다. 삼성그룹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맹공을 받자 지난해 6월 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 설치를 약속했었다.
사외이사 3명과 외부전문가 3명으로 이뤄진 이 위원회는 지난해 10월 30일과 올해 1월 22일 두 차례 열렸다. 두 번째 회의에서는 삼성물산의 삼성엔지니어링 유상증자 참여를 놓고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외부전문가로 참여한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내에서는 거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어 글로벌 기업들의 주주권익 보호 활동을 참고하고 있다”고 했다. 주주권익보호 담당위원인 이종욱 국민행복기금 이사장(삼성물산 사외이사)은 지난해부터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을 만나 주주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삼성의 이런 변화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삼성은 그러나, ‘돈 잘 버는 회사’에서 ‘존경받는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이제 겨우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