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포기였다. 친구는 분위기 좋은 커피숍과 와인 바에 종종 가곤 했는데 그간 쓴 돈을 따져 보니 ‘어마 무시’했다. ‘언젠가 집을 사면 카페처럼 꾸며야지’라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도통 가늠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집은 포기했다. 대신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혼자서 거실 한쪽을 파란색으로 칠하고 거실 중앙에 6인용 테이블을 들였다. 소파 밑에 러그를 깔고 니트 쿠션을 올려 안락감을 더했다.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65만 원을 내는, 17평(약 56m²)짜리 허름한 아파트는 근사한 카페로 변신했다. 친구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행복감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세대 전·월세 유목민’이 늘면서 홈 퍼니싱(home furnishing)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는 가구와 조명 벽지 침구 소품 등을 이용해 가볍게 집을 꾸미는 것을 뜻한다. 전·월세를 벗어나지 못하며 집 꾸미기를 미뤄왔던 젊은 세대들의 욕구가 터진 것이다. 1인 가구 증가도 한몫한다.
이들은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닌데 귀찮게 꾸며서 뭐하나. 나중에 집 사면 하지’라던 부모 세대와 다르다. 셀프 인테리어를 하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아예 집 꾸미기를 취미로 삼기도 한다. 또 주말이면 늦잠에서 겨우 깨어 TV만 보던 기존 세대와 달리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책을 읽고 무언가를 만든다. LG하우시스는 올해 트렌드로 ‘홈스케이프’(집으로의 탈출)를 꼽기도 했다.
혹자는 이들이 각박한 현실에서 집으로 도피한다고도 한다. 일견 맞다. 하지만 시각의 차이다. 신세대 집돌이 집순이는 남을 의식하기보다 내면을 돌보는 데에 우선순위를 두고 나만의 행복을 찾는다. 한 설문업체의 조사 결과 ‘집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고 한 사람이 81.9%에 달했다.
이들은 천편일률적인 인테리어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담은 공간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TV 프로그램도 ‘쿡방’에서 ‘집방’으로 넘어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백종원식 홈 퍼니싱 레시피’를 알려준다. 덕분에 남성도 가세하고 여성도 전동 드릴을 들고 나선다. 실제로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만 달러에 진입하면 인테리어 시장이 커진다. 이미 일본이 그랬다.
산업 지형도 바뀌고 있다. 한샘의 시가총액은 우리은행과 LG유플러스, 삼성카드, 현대백화점 등 쟁쟁한 기업을 넘어섰다. 이랜드(버터, 모던하우스), 신세계(자주, 더 라이프) 등도 홈 퍼니싱을 강화하고 있다.
집이 로또복권인 시대는 지나고 있다. 집은 투자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즐기는 공간, 즉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으로 바뀌고 있다.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고 인테리어 책과 블로그를 탐독하며 홈 퍼니싱을 혼자 해낸 친구가 말했다. 집을 꾸미는 것처럼 행복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굴러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노력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과정이 바로 삶이라고.
맞다. 누추한 방에 향초 하나 들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질 수 있다. 깊고 긴 이 불황이 언제 끝날지, 내 집을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든 게 불확실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있는 법, 오늘을 잘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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