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타계한 지 2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의 소설 ‘백년의 고독’을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주인공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주변의 모든 것에서 사랑하는 소녀 레메디오스를 떠올린다.
“나른한 오후 두 시의 공기 속에 있는 레메디오스, 장미가 조용히 발산해 내는 향기 속에 있는 레메디오스, 나방들이 뒤덮고 있는 물시계 안에 있는 레메디오스, 아침 빵에서 솟아오르는 김 속에 있는 레메디오스, 어디에나 있는 레메디오스, 영원히 존재하는 레메디오스….”
사랑에 빠진 이들의 상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가 보다. 이별 뒤에도 마찬가지다.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진 저 의자 위에도/물을 마시려 무심코 집어든 유리잔 안에도/나를 바라보기 위해 마주한 그 거울 속에도/귓가에 살며시 내려앉은 음악 속에도/네가 있어”(넬 ‘기억을 걷는 시간’)
좀 비약해 보자. 이처럼 낯선 사람, 심지어 솟아오르는 김이나 의자 속에 ‘당신’, 즉 숭배하는 대상이 있다면 우리는 낯선 것들을 얼마든지 사랑하고 반길 수 있을 거다. 구약성경에서 신이 아브라함 앞에 낯선 나그네로 모습을 드러내고 아브라함이 나그네 일행을 왕같이 대접한 것처럼 말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적어서일까. 사회에서 낯선 이라면 곧 사회적 약자일 텐데, 우리 현실은 약자를 환대하기는커녕 조롱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최근 한부모 가정을 희화화한 케이블TV 개그가 논란이 됐다. 사실 지상파도 오랫동안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왔다.
사회적 약자 캐릭터가 개그에서 조롱당하지 않고 오히려 성찰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선사할 수는 없을지 생각해 본다. 발달장애인이 ‘동네 바보 형’이 아니라 서양 중세의 광대 캐릭터처럼 등장할 수도 있을 거다. 범인과는 다른 지혜를 갖고 있으며 헛소리를 통해 영주의 잘못을 꼬집기도 했던 광대 말이다. 어눌한 말투로 ‘사장님 나빠요’라며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 공감을 일으켰던 ‘블랑카’ 같은 모델도 있지 않나.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 그리움의 수만큼, 억울한 죽음의 수만큼 제주에는 당신이 많다… 감귤이 당신이 되고, 은대금잔의 제주 수선화가 당신이 되고, 흔들리는 아기동백이 당신이 된들 이상할 것이 없다. 저자거리의 옥돔 돌돔이, 전복 소라 멍게가 어느 날은 당신이 되고 말 것이다. 들판의 감자와 고구마가 무 배추 당근이 또 당신이 되는 날도 올 것이다.”
병마와 싸우다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난 주용일 시인의 시 ‘제주에는 당신이 많다’의 한 구절이다. 한국에서는 굶는 이들 앞에서 폭식하는 일이 벌어지더니 미국에서는 약자 조롱으로 구설에 오르는 일이 잦은 사람이 유력 대선 후보가 됐다. 이 시 구절처럼 ‘산꼭대기에서 바다 깊은 물속까지 삼라만상이 온통 당신이 되는 날’이 오기까지는 우리의 감수성이 아직 한참 모자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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