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유영]21세기의 소작농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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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보증금 3억 원, 월세 3000만 원.’

회사 근처 빈 점포의 외벽에 이런 문구가 나붙었다. 커피집이 있던 자리였다. 단순 계산해 커피 한 잔에 5000원으로 치면 하루 200잔을 팔아야 임대료가 빠진다. 인건비 등을 건지고 이윤까지 남기려면 대체 커피 몇 잔을 팔아야 하는 걸까. 임대료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곱셈과 덧셈을 하자니 머릿속이 새삼 아득해졌다.

대도시의 웬만한 지역에선 ‘임대료 리스크’가 일상화됐다. 저금리 시대에 믿을 만한 건 역시 임대료인 걸까. 한 지인은 맥줏집을 하면서 월 170만 원을 내던 임차료를 월 250만 원으로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달 기준금리 인하로 건물주의 기대 수익률이 낮아졌는데 부동산 시장은 오히려 이런 흐름과 거꾸로 간다”고 하소연했다.

심지어 세입자인 자영업자가 다시 세를 놓는 경우도 있다. 생활용품 판매업자인 A 씨는 서울 강북에서 월 500만 원의 임차료를 낸다. 그는 이 돈을 바로 옆 옷 가게 주인에게 준다. 옷가게 주인이 불황으로 장사가 안 되자 자신의 가게를 쪼개 A 씨를 세입자로 받아들였다. 목돈이 부족한 A 씨는 보증금을 내지 않는 대신 월세를 시가의 2배가량 낸다. 임대료를 깔고 들어온다 해서 ‘깔세’로 불리는 전대차(轉貸借) 계약이다. 그는 “인건비 건지기도 힘들다”며 “목청 터져라 물건 팔아 남는 돈의 대부분을 임차료로 바치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자영업자는 지주에게 땅을 빌려 사용료를 내는 소작농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지대(地代·rent)는 공급 제한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과점적 이익이다. 땅과 건물이 한정되어 있으니 지주는 노동이나 자본을 추가 투입하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이윤을 얻는다. 돈이 넉넉하다면 힘들게 일하기보단 건물주가 되는 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문제는 월급쟁이 상당수가 ‘잠재적인 치킨집 사장님’이라는 점, 그래서 은퇴 후 자영업에 뛰어드는 이들이 과도한 임대료와 갑작스러운 임대료 인상 리스크에 상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외교관 출신으로 강남에서 우동집을 운영하는 신상목 씨는 “근로 계약에서 낮은 임금을 막기 위한 최저임금제가 필요한 것처럼 임대차 계약에서 지나친 소득 이전을 막기 위한 규범이 필요하다”며 “임차인이 영업의 지속을 보장받기 위해 건물주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영업 대책에 대한 논의는 1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그간 동네 사장님들의 사정이 딱히 나아졌다는 소식을 접해보지 못했다. 노후 보장이 미비한 사회안전망 탓일까. 좋은 일자리를 못 낳는 불임(不姙)형 산업구조 탓일까. 생산성이 낮은 데다 판박이형 창업을 되풀이하는 문화 탓일까. 어디부터 꼬인 건지 모르겠다. 다만 자영업에서 임대료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빈곤한 사장님’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어느새 회사 인근 점포에 또 다른 커피점이 들어섰다.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가게에서, 달뜬 표정의 새 사장님이 월 3000만 원의 임차료를 감당하려면 커피 몇 잔을 팔아야 할까. 다시 셈해본다.

김유영 오피니언팀 기자 abc@donga.com
#임대료#임대료 리스크#깔세#전대차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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